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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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영업점 직원들이 실적 달성을 위해 고객 동의 없이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의 비밀번호를 제멋대로 바꿨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의 일탈이 이제는 모럴해저드를 넘어 거의 범법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은행은 그렇지 않아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라임자산운용 펀드 환매중단 사태와도 엮여 있어 금융당국으로부터의 징계는 물론 고객 신뢰도의 급격한 추락도 불가피해 보인다.

은행 등 금융회사에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이 본업에서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본업을 벗어난 부대 수입으로 돈을 벌거나 비용을 줄이려는데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의 이번 고객 비밀번호 도용 건만해도 그렇다. 은행 고객의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 이용 건수가 늘어나면 은행으로서는 오프라인 점포를 운영하는데 드는 막대한 유지비용과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은행의 본업은 고객의 예금을 받아 적정 이자를 지급하고 이 돈을 재원으로 대출을 해주는 것이다. 은행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예금 고객에게는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시하고 대출 금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해야 한다. 쉽지 않은 목표지만 그렇게 돈을 굴리는 나름의 노하우가 은행 경쟁력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은행간 금리는 큰 차이가 없고 그저 앉아서 챙기는 예대마진(예금 금리와 대출 금리의 차이)으로 '땅짚고 헤엄치기'를 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지 오래다. 은행의 금리 장사가 정치권의 단골 비판 메뉴가 된 것도 그래서다. 은행들은 이런 비판을 의식해 예대마진 중심의 영업에서 벗어나겠다며 나름 다양한 수익원 개발에 나서왔다. 수수료 수익 확대, 해외 진출, 투자은행 부문 강화 등이 그런 것들이다.

문제는 여기서도 생겼다. DLF를 비롯한 각종 펀드 판매는 은행 수수료 수입의 중요한 부분중 하나다. 그러나 판매를 담당하는 창구직원 중에는 정작 자신도 잘 내용을 모르는 고위험 상품을 고객에 파는 일도 벌어진다. 이른바 블완전 판매 이슈가 불거지는 것이다.

본업에서 실력 발휘를 못하니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갖게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꾸 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비단 은행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내 금융사 중 본업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는 곳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다. 증권사만 해도 그렇다. 전통의 브로커리지(주식 중개) 수입 이외에 투자은행 업무와 자기 매매를 하고 있지만 선진국 증권사에 비해 전문성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증권사들은 한동안 ELS(주가연계 증권)와 펀드 판매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지만 시장이 한번 크게 출렁이면 여지없이 고객 손실로 이어졌다. 천수답처럼 시황이 좋아야만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굳이 증권사나 자산운용사가 왜 필요한가. 국내 투자자들이 증권사를 못믿겠다며 주식 투자는 물론 국내 펀드 투자도 외면하고 이제는 해외주식 직구에 눈을 돌리는 이유다.
최근 큰 시장으로 떠오르는 퇴직 연금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은행이나 증권사들은 확정기여형(DC) 퇴직 연금이 대세가 되면서 고객 유치를 위해 한동안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고객 유치가 일단락되자 적극적 마케팅에 나서지 않고 있다. 퇴직 연금 계좌를 한번 유치하면 수익과 무관하게 따박따박 수수료가 들어오기 때문에 고객을 '잡아 놓은 물고기' 취급하는 것이다.

최근 퇴직연금의 '쥐꼬리 수익'에 대한 비판이 일자 일부 금융사들이 퇴직연금이 손실나면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그동안 금융사들이 퇴직연금을 무성의하게 운용해왔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부 증권사들은 TDF( Target Date Fund)를 내세우며 이 펀드가 무슨 퇴직연금 운용의 '마이다스의 손'이라도 되는 듯 선전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사실 특별한 것도 없다. 전 세계 주식과 채권에 골고루 투자하되 가입자의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점차 주식 같은 위험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채권 같은 안전자산의 비중을 높이는 정도다. 물론 여기엔 적잖은 수수료가 붙는다.

국내 금융사들은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거의 예외 없이 영문 이름을 붙인다. ELS, ELW, DLF, TDF, ISA 같은 것들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이름만으로는 도대체 무슨 상품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대부분이 해외 선진국에서 이미 개발된 상품이어서 그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좀 더 알기 쉽게 우리말로 상품명을 번역해도 될 것을 굳이 영문 약자를 쓰는 이유는 뭘까. 고객으로 하여금 뭔가 더 어렵게 느끼게 만들고 그래서 꼬치꼬치 따져 묻지 말고 그냥 금융사 직원이 권해주면 가입하라는 의도가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정작 창구 직원들에게 저 난해한 이름의 상품에 대해 캐묻기 시작하면 몇 단계 지나지 않아 "자기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금융산업 종사자들은 규제 핑계를 많이 댄다. 절반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 과연 얼마나 전문성과 경쟁력이 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어려운 용어의 방패 뒤에 숨어 자기도 잘 모르는 상품을 팔아 수수료만 챙기면서 너무 많은 급여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이번 우리은행의 비밀번호 도용 사고는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직원의 실력보다는 가입자 숫자나 계좌 유치 실적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인사고과를 하고 본업 경쟁력보다는 부대 수입을 올리는데 혈안이 돼 온 잘못된 관행이 쌓이고 쌓여 벌어진 일이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