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한국대사관 터 사준 신격호 회장…애국심 남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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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공채1기' 권익부 前 소장이 기억하는 故 신격호 명예회장
"이게 일본선수 눕힌 주먹이냐"
권투선수 홍수환 승리에 환호도
22일 송파구 롯데홀서 영결식
"이게 일본선수 눕힌 주먹이냐"
권투선수 홍수환 승리에 환호도
22일 송파구 롯데홀서 영결식
세상을 떠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빈소에는 21일에도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김범석 쿠팡 대표 등 경영계 주요 인사와 송철호 울산시장 등 정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이들 중에는 권익부 전 롯데중앙연구소장(80·사진)도 있었다. 그는 신 명예회장이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뒤 1965년 처음 한국으로 건너왔을 때 롯데에 입사한 한국 롯데 공채 1기다. 그를 만나 고인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권 전 소장은 “신 명예회장은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눈이 누구보다 탁월했다”고 했다. 롯데가 1970년대 말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그는 “당시 이란 정부가 무너지자 한국 정부는 석유화학 투자를 접기로 했다. 한국이 이란에 투자한 220억달러를 다 날릴 상황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반대로 이때 한국이 석유화학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에서 생수가 많이 팔릴 때 신 명예회장은 물값이 20원이고 용기가 40원 하니 용기를 한국에서 제조해 일본에 수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롯데의 첫 석유화학 제품은 플라스틱 옷걸이였다. 권 전 소장은 “고인이 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와이셔츠를 수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며 롯데에 요청했다”고 했다.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신 명예회장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석유화학은 롯데그룹에서 이익을 가장 많이 내는 캐시카우가 됐다.
부동산에 대한 각별한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도 소개했다. “신 명예회장은 주변에 한 평이라도 좋으니 명동 땅을 사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오를 수밖에 없는 땅은 사 두면 큰돈이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 땅 가운데 한 곳이 서울 서초동 롯데칠성 공장 터라고 권 전 소장은 전했다.
사업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고 한다. 화장품 사업이 그랬다. 신 명예회장은 1947년 일본에서 껌 사업과 화장품 사업을 같이했다. 이후 껌 사업이 커지면서 1년 만에 화장품 사업을 접었다. 껌 주문이 폭주해 사업을 함께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롯데의 화장품 사업 규모는 시세이도와 비슷했다. 권 전 소장은 “1980년대 중반 신 명예회장이 ‘그래도 화장품을 계속했어야 했어’라고 몇 번을 말하며 아쉬워했다”고 했다.
애국심은 신 명예회장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에 신 명예회장이 다른 사업가들과 함께 주일 한국대사관 땅 4960㎡를 사줬다”고 했다. “인부들과 함께 대사관에 나무까지 심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권투 세계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 씨와 신 명예회장의 인연도 전했다. 1978년 홍씨가 챔피언 방어전에서 일본인을 때려눕히자 곧바로 그를 보자고 했다고 한다. “신 명예회장이 홍씨 주먹을 보고 ‘이게 일본 선수를 때려눕힌 주먹이냐’며 감탄했다. 그는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말은 잘 안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애국심을 표현하곤 했다”고 덧붙였다.
안효주/오현우 기자 ahnjk@hankyung.com
이들 중에는 권익부 전 롯데중앙연구소장(80·사진)도 있었다. 그는 신 명예회장이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뒤 1965년 처음 한국으로 건너왔을 때 롯데에 입사한 한국 롯데 공채 1기다. 그를 만나 고인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권 전 소장은 “신 명예회장은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눈이 누구보다 탁월했다”고 했다. 롯데가 1970년대 말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그는 “당시 이란 정부가 무너지자 한국 정부는 석유화학 투자를 접기로 했다. 한국이 이란에 투자한 220억달러를 다 날릴 상황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반대로 이때 한국이 석유화학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에서 생수가 많이 팔릴 때 신 명예회장은 물값이 20원이고 용기가 40원 하니 용기를 한국에서 제조해 일본에 수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롯데의 첫 석유화학 제품은 플라스틱 옷걸이였다. 권 전 소장은 “고인이 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와이셔츠를 수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며 롯데에 요청했다”고 했다.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신 명예회장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석유화학은 롯데그룹에서 이익을 가장 많이 내는 캐시카우가 됐다.
부동산에 대한 각별한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도 소개했다. “신 명예회장은 주변에 한 평이라도 좋으니 명동 땅을 사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오를 수밖에 없는 땅은 사 두면 큰돈이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 땅 가운데 한 곳이 서울 서초동 롯데칠성 공장 터라고 권 전 소장은 전했다.
사업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고 한다. 화장품 사업이 그랬다. 신 명예회장은 1947년 일본에서 껌 사업과 화장품 사업을 같이했다. 이후 껌 사업이 커지면서 1년 만에 화장품 사업을 접었다. 껌 주문이 폭주해 사업을 함께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롯데의 화장품 사업 규모는 시세이도와 비슷했다. 권 전 소장은 “1980년대 중반 신 명예회장이 ‘그래도 화장품을 계속했어야 했어’라고 몇 번을 말하며 아쉬워했다”고 했다.
애국심은 신 명예회장을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에 신 명예회장이 다른 사업가들과 함께 주일 한국대사관 땅 4960㎡를 사줬다”고 했다. “인부들과 함께 대사관에 나무까지 심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권투 세계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 씨와 신 명예회장의 인연도 전했다. 1978년 홍씨가 챔피언 방어전에서 일본인을 때려눕히자 곧바로 그를 보자고 했다고 한다. “신 명예회장이 홍씨 주먹을 보고 ‘이게 일본 선수를 때려눕힌 주먹이냐’며 감탄했다. 그는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말은 잘 안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애국심을 표현하곤 했다”고 덧붙였다.
안효주/오현우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