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동행] 48년간 5억원 기부…'양산 산타클로스' 정상모씨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배곯던 기억 되짚어 나눔 생활화…이번 설에도 쌀 300여포 내놔
"사치 줄이면 나눌 수 있어" 정작 자신은 밑창 헤진 운동화 고집
"우리 가족은 아직 해외여행 한 번 못 갔어요.
아내는 화장대 하나 없이 살면서도 더 열심히 기부하라고 재촉합니다"
1972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경남 양산의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 정상모(79) 씨는 '양산의 산타클로스'로 통한다.
햇수로 따지면 어느새 48년째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주변과 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일종의 의무감처럼 강해지기만 했다.
기부 첫해 받은 경남도 경찰국장 감사장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받은 각종 공로패와 표창장만 100여개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부액도 어느새 5억원에 달한다.
올해도 설 연휴를 맞아 쌀 300여포(2천만원어치)를 양산시에 기탁할 예정이다.
그는 1983년부터 15년 동안 모교인 서창초등학교 앞에서 거의 매일 교통정리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못 먹고 못 살던 기억 때문에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기부를 시작했어요.
사치 부리고 싶은 돈 조금만 아끼면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현금 60만∼70만원을 갖고 다니다 폐지 줍는 노인을 보면 따뜻한 밥 한 끼 사드시라며 조금씩 나눠 드리죠". 양산 출신인 그는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 집안이었던 터라 어린 시절부터 배를 곯는 일은 일상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퇴학당했고, 수학여행을 보내 달라고 떼쓰다 부모님께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맞기도 했다.
보리밥 한 그릇 제때 먹기 힘들던 그 시절, 한번은 아버지 점심밥을 몰래 훔쳐먹다가 어머니께 걸려 집 밖으로 쫓겨난 적도 있다.
도망치듯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수송병 특기를 살려 건축자재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부산 태광산업 일감을 주로 도맡아 3∼4년 동안 자갈과 모래 등을 실어 날랐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기반으로 몇해 안 가 제법 큰 돈을 모았고, 이를 본 태광산업 사장이 "포부가 있는 친구 같다.
열심히 일하도록 돕겠다"고 격려할 정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저축한 돈으로 고향 인근 논 6만6천㎡를 사들였다.
그리고는 귀향 후 돼지 사육까지 겸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업은 번창해 어느새 동네으로부터 '재력가' 소리까지 듣는 수준에 이르렀다.
남 부러운 것 없는 재산을 모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검소한 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평생 그럴싸한 승용차 한 대 사본 적 없이 여태껏 분신이나 다름없는 농사용 1t 트럭을 몰고 다니고, 밑창이 다 낡아 헤진 운동화 한 켤레를 매일같이 신고 다닌다.
2007년 대통령상을 받을 당시는 제대로 된 양복 한 벌이 없어 인근 재래시장을 급히 찾아 싸구려 양복을 사 입고 청와대로 향한 적도 있다.
가족과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간 적도 없다.
섭섭하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오히려 가족들은 그에게 기부활동을 더 장려한다.
"오래 전 지인 부탁으로 국회의원선거 지원유세를 한 적이 있어요.
연단을 내려온 뒤 청중과 악수하는 후보자와 마주쳤는데, 내 행색을 보더니 손을 쏙 빼고 지나치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저를 알아보고 반갑게 악수하는 모습을 본 그 후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젊은 친구였는데, 옷차림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것 같아요".
그라고 해서 구김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면서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200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이후 잊을만하면 한번씩 병이 재발해 지금도 심장박동기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닌다.
재력가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지인들에게 떼인 돈도 많다.
그는 돈도 돈이지만, 그 과정에서 관계까지 소원해지는 것을 마음 아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이웃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정씨는 "농사나 사업은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못 하지만, 기부활동은 세상을 뜨는 날까지 계속할 생각"이라며 "이런 저를 원망하는 대신 격려하고 앞장 서서 도와주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며 활짝 웃었다.
/연합뉴스
"사치 줄이면 나눌 수 있어" 정작 자신은 밑창 헤진 운동화 고집
"우리 가족은 아직 해외여행 한 번 못 갔어요.
아내는 화장대 하나 없이 살면서도 더 열심히 기부하라고 재촉합니다"
1972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경남 양산의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 정상모(79) 씨는 '양산의 산타클로스'로 통한다.
햇수로 따지면 어느새 48년째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주변과 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일종의 의무감처럼 강해지기만 했다.
기부 첫해 받은 경남도 경찰국장 감사장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받은 각종 공로패와 표창장만 100여개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부액도 어느새 5억원에 달한다.
올해도 설 연휴를 맞아 쌀 300여포(2천만원어치)를 양산시에 기탁할 예정이다.
그는 1983년부터 15년 동안 모교인 서창초등학교 앞에서 거의 매일 교통정리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못 먹고 못 살던 기억 때문에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기부를 시작했어요.
사치 부리고 싶은 돈 조금만 아끼면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도 현금 60만∼70만원을 갖고 다니다 폐지 줍는 노인을 보면 따뜻한 밥 한 끼 사드시라며 조금씩 나눠 드리죠". 양산 출신인 그는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 집안이었던 터라 어린 시절부터 배를 곯는 일은 일상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퇴학당했고, 수학여행을 보내 달라고 떼쓰다 부모님께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맞기도 했다.
보리밥 한 그릇 제때 먹기 힘들던 그 시절, 한번은 아버지 점심밥을 몰래 훔쳐먹다가 어머니께 걸려 집 밖으로 쫓겨난 적도 있다.
도망치듯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수송병 특기를 살려 건축자재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부산 태광산업 일감을 주로 도맡아 3∼4년 동안 자갈과 모래 등을 실어 날랐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기반으로 몇해 안 가 제법 큰 돈을 모았고, 이를 본 태광산업 사장이 "포부가 있는 친구 같다.
열심히 일하도록 돕겠다"고 격려할 정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저축한 돈으로 고향 인근 논 6만6천㎡를 사들였다.
그리고는 귀향 후 돼지 사육까지 겸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업은 번창해 어느새 동네으로부터 '재력가' 소리까지 듣는 수준에 이르렀다.
남 부러운 것 없는 재산을 모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검소한 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평생 그럴싸한 승용차 한 대 사본 적 없이 여태껏 분신이나 다름없는 농사용 1t 트럭을 몰고 다니고, 밑창이 다 낡아 헤진 운동화 한 켤레를 매일같이 신고 다닌다.
2007년 대통령상을 받을 당시는 제대로 된 양복 한 벌이 없어 인근 재래시장을 급히 찾아 싸구려 양복을 사 입고 청와대로 향한 적도 있다.
가족과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간 적도 없다.
섭섭하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오히려 가족들은 그에게 기부활동을 더 장려한다.
"오래 전 지인 부탁으로 국회의원선거 지원유세를 한 적이 있어요.
연단을 내려온 뒤 청중과 악수하는 후보자와 마주쳤는데, 내 행색을 보더니 손을 쏙 빼고 지나치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저를 알아보고 반갑게 악수하는 모습을 본 그 후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젊은 친구였는데, 옷차림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것 같아요".
그라고 해서 구김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면서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200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이후 잊을만하면 한번씩 병이 재발해 지금도 심장박동기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닌다.
재력가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지인들에게 떼인 돈도 많다.
그는 돈도 돈이지만, 그 과정에서 관계까지 소원해지는 것을 마음 아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이웃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정씨는 "농사나 사업은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못 하지만, 기부활동은 세상을 뜨는 날까지 계속할 생각"이라며 "이런 저를 원망하는 대신 격려하고 앞장 서서 도와주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며 활짝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