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 특정할 정도 구체적이지 않아 '피의사실 공표' 단정 어렵다"
공개소환 위법성도 불인정…조국 일가 재판서도 논의될 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 의혹 사건 주요 피고인들의 1심을 맡은 재판부가 '피의사실 공표' 등 검찰 수사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를 대부분 기각했다.

'사법농단' 피의사실공표·과잉수사 주장에 재판부 "인정 안돼"(종합)
사법농단 의혹 사건 수사를 거치며 검찰의 수사 관행을 놓고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가 이뤄진 상황에서, 이 사건을 맡은 법원이 사실상 첫 판단을 내놓은 것이라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박남천 부장판사)는 13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에게 무죄를 선고하기에 앞서, 유 전 수석 측이 주장한 '공소 기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 전 수석은 재판에 넘겨진 이후 "검찰이 총체적 위법 수사를 했다"며 자신의 재판을 이를 바로잡는 '디딤돌'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의사실 공표, 표적 수사, 과잉수사,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비공개 면담 조사, 별건 압수수색, 영장주의 위반 등 문제를 제기하며 검찰의 공소를 기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수사상황 실시간 보도·3차장 문자메시지…"피의사실 공표 단정 못 해"
이날 재판부는 그러나 이런 유 전 수석의 주장을 하나하나 따져본 뒤 "공소제기의 절차 자체가 법률을 위반해 무효인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우선 재판부는 위법한 피의사실 공표가 있었는지를 따지기 위해 실제로 '단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수사 상황을 구체적으로 쓴 여러 건의 언론 기사,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명의의 기자단 문자메시지가 수시로 발송된 사례 등을 살펴봤다.

이런 사례 중에는 실시간으로 압수수색영장 집행과 관련한 보도가 이뤄지거나, 심지어 검찰 조사를 받은 피의자가 착각해서 진술한 내용이 그대로 보도된 경우도 있었다고 재판부는 꼬집었다.

이런 피의사실 공표로 인해 범죄 혐의자나 피해자 등이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도 재판부는 지적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이를 '위법 수사'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언론의 중점 취재대상이었고, 수사기관이 이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정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표의 형식을 봐도 불특정 다수에게 피의사실을 알리기 위해 보도자료를 공개 발표하거나 배포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붙였다.

재판부는 또 "수사 진행 상황과 극히 인접해 관련 내용이 보도된 것만으로 검찰이 의도적으로 기자들에게 내용을 전부 알려줬다 단정하기 어렵다"며 "3차장검사의 '풀 문자(취재기자에게 공통되게 전달한 문자)' 메시지도 법원의 영장 기각에 대한 비난일 뿐 구체적 피의자실이 언급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수사기관이 기자들에게 알려 준 내용이 증거인멸죄나 공무상 비밀누설죄 등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다"며 "피고인의 피의사실을 공표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는 수사기관이 언론에 알려준 내용이 범죄 혐의를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불법적인 피의사실 공표가 성립한다고 엄격히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법농단' 피의사실공표·과잉수사 주장에 재판부 "인정 안돼"(종합)
◇ 과잉·표적수사 주장도 안 받아들여…"경험상 범죄 가능성 의심되면 수사 가능"
유 전 수석은 "검찰이 나를 '키 맨'으로 지목하고 대법원 내부 문건을 손쉽게 확보하려다가 협조를 받지 못하자 서울중앙지검장의 지휘로 과잉·별건·표적수사를 했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우선 '검사는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수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195조를 근거로 들었다.

그러면서 "'사료'하는 때란 근거 없는 추측에 의거한 것으로는 부족하지만, 수사기관의 수사경험상 범죄행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할 정도면 수사를 개시할 수 있다"고 설시했다.

아울러 "수사의 개시·종결 판단은 수사기관의 합리적 재량에 위임된 행위"라며 "이를 위법하다고 하려면 수사기관의 조치가 현저하게 불합리하거나 경험칙과 논리상 도저히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인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유 전 수석의 경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에서 나온 자료 등을 보면 사건에 관여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유 전 수석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을 두고도 "영장 청구 여부 판단은 검사의 고도의 재량 범위 내에 있다"며 "피고인이 많은 자료를 폐기한 것을 검사가 확인한 이상, 증거인멸의 우려가 높다고 판단한 것 역시 구속영장 청구 원인 중 일부일 것이므로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 공개소환·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등 문제제기도 기각…일부 문제의식은 인정
유 전 수석은 검찰의 공개소환으로 인격권이 침해됐다는 주장도 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출석 사실이 언론에 공개돼 집중 취재됨으로 인해 엄청난 심리적 위축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충분히 추단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포토라인'은 국민의 알 권리 실현과 인권 보호를 조화하기 위해 합의에 따라 자율적으로 설정된 것"이라며 "포토라인 설정 자체에 수사기관이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공개소환이 위법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현행법이 피의자나 참고인을 공개 소환할지 여부와 그 절차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공소장 내 범죄사실과 관련 없는데도 검찰이 법원의 예단을 유도할 만한 내용을 공소장에 넣어 '일본주의(一本主義)'를 위반했다는 유 전 수석의 주장에 대해서도 "범죄사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검찰의 공소사실 내용을 두고 "강한 유죄 예단이 생기게 할 효과를 낸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재판부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적법하지 않은 방식으로 수집된 증거가 일부 있다는 사실도 일부 인정했다.

사법농단 사건 수사가 검찰의 각종 수사 관행에 대한 논란을 사실상 처음 본격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이날 재판부의 판단은 주목된다.

'사법농단' 피의사실공표·과잉수사 주장에 재판부 "인정 안돼"(종합)
일례로 당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취재진이 설치한 포토라인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후 법조계에서 포토라인의 적법성에 관한 논의가 이뤄진 바 있다.

유 전 수석 역시 수사 단계부터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로 자신이 '파렴치범'으로 몰리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 수사에서 처음 제기된 이런 비판은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그 결과 검찰이 공개 소환을 폐지하는 등 변화가 일어났다.

피의사실 공표나 강압수사·표적수사 등 위법수사 논란을 두고는 관련 사건의 재판에서 또 공방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