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은비령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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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인제천리길 10구간…겨울 산행의 즐거움 가득
겨울 산길은 황량하다.
나무들은 헐벗었다.
그렇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오히려 매력적이다.
대기는 유리처럼 차고 투명하다.
하늘은 푸르고 높다.
잎을 떨어뜨린 채 온몸을 드러낸 나목들 사이로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나그네는 철학자가 된다.
◇ 고즈넉한 겨울 산길의 손짓
인제천리길 20개 구간 중 열번째 구간은 가리산방재체험마을에서 시작해 대목령, 필례약수를 지나 군량분교까지 이어지는 12㎞의 둘레길이다.
필례약수터 길은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누구는 이 길이 남한에서 가장 멋진 단풍길이라고 극찬한다.
필례 단풍을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인제천리길 10구간에는 가벼운 겨울 산행의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코스인데도 사람의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았다.
원시림에 가까운 숲을 가로지른다.
제법 크고 긴데도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계곡을 한동안 끼고 걷는다.
약간 어려운 오르막 구간이 있긴 하지만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걸으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10구간 출발점인 가리산방재체험마을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에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내 봉우리 중 대청봉(1,707m) 다음으로 높은 가리봉(1,518m)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여름 이 일대에서 유례없는 폭우로 7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억원의 재산피해가 난 뒤 방재 의식을 일깨우고자 조성됐다.
국내 유일의 방재체험마을이다.
재난대응, 구조, 피난, 안전지도만들기, 안전산행법 등을 체험하거나 배울 수 있다.
주로 초중등 학생 교육에 이용된다.
가리산방재체험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1.5㎞ 정도 걸으면 대목령으로 올라가는 산길 초입에 이른다.
좀 가다 보면 산길은 소로로 바뀐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길이 잘 구분되지 않기도 했다.
동행하며 코스를 설명해준 정준교 가리산방재체험마을 사무장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걷기 경험이 조금만 있어도 산길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인제천리길'이라고 씐 표지기가 짧은 간격으로 나뭇가지에 달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대목령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라 조금 힘들 수는 있겠다.
산길을 걸으려면 다리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한국등산레저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이기도 한 정 사무장은 "속도를 조절하면 된다"라는 답을 들려줬다.
평지를 걸을 때와 같은 힘을 들이면서도 편안한 느낌으로 산길을 오르려면 천천히 가면 된다는 것이다.
평지에서 걷던 빠른 속도로 산길을 가려고 욕심을 부리면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각자 체력에 맞는 페이스에 만족한다면 어떤 산길도 오를 수 있다는 게 정 사무장의 조언이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수 있는 산비탈의 좁은 오르막도 그의 충고대로 서두르지 않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길에 접어든 지 30∼40분쯤 지났을까.
맑디맑은 물이 제법 많은 양으로 흘러 아름다운 풍광에 다채로움을 더하는 계곡이 나왔다.
이름 없는 지류 계곡이라고 한다.
꽤 길고 큰 데도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설악산 주변에 워낙 빼어난 명승지가 많아서라고 한다.
유명세에 치여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계곡일수록 지역 주민들이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정 사무장의 말이 통찰력으로 다가온다.
가는 길 곳곳에 산짐승들의 배설물이 있었다.
약초를 캐는 이들은 산에 사는 동물들과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는데 이런 것들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고 한다.
◇ 대목령·필례령·큰눈이고개·은비령
거센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고사목들을 넘어 또박또박 걷다 보니 어느새 대목령이다.
이 고개는 필례령, 큰눈이고개, 은비령이라고도 불린다.
은비령이라는 명칭은 소설가 이순원의 동명 소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이 고갯마루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의 무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어여쁜 이름들이다.
필례라는 이름은 대목령 아래 필례약수터의 모양이 베 짜는 여인(필녀·匹女)의 형상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다.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에는 '필노', '필여'라는 표기로 등장한다고 한다.
도와주는 고개, 힘을 아껴주는 고개의 뜻이 있다.
즉 지름길이라는 말인데 옛날에는 이 길이 강원도 영서와 영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필례령은 동해안에서 만들어진 소금이 내륙 산골로 전해지던 '소금길'이었다.
양양에서 구운 소금, 말린 생선 등이 봇짐으로, 혹은 나귀와 소의 등에 실려 필례령을 넘어와 인제에서 곡식, 나물, 버섯 등으로 교환됐다고 한다.
대목령에 오르는 동안 기온은 평년보다 낮았지만, 좌우의 봉우리들이 막아주는지 바람은 세지 않았다.
기온이 최저 영하 6도였다고 하는데 체감온도가 낮지 않아 걷기가 즐겁고 쾌적했다.
대목령 옆 봉우리에 오르면 가리봉 일대를 360도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다.
멀리 대청봉까지 눈에 들어온다.
가리봉 정상이 하얗다.
눈이 아니라 상고대라고 한다.
정오가 되도록 녹지 않았다.
정상 부근은 역시 바람이 찬가 보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다.
길은 조금 얼었는데 미끄럽지 않다.
약간 얼어 울퉁불퉁하고 뽀스락거리는 지표가 등산화 바닥의 요철과 맞물려 오히려 미끄럼을 막아주는 것 같다.
걷기에 좋다.
오래전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집터, 돌담, 산죽 등이 눈에 띄었다.
50년도 훨씬 더 된 화전민 터이리라.
이곳이 앞서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고 활동 무대였다고 생각하니 정겹다.
누구도 긴 시간과 역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확인하는 흔적 같기도 하다.
나무 밑동에 회색 페인트 자국 같은 게 있다.
깊은 산 속 나무에 페인트칠이라니! 가당찮은 짐작이다.
정 사무장은 진흙에 뒹군 산짐승들이 등을 비비고 난 뒤 남은 자취라고 한다.
산짐승들은 한 번 비빈 자리를 다시 찾아 그곳에 등을 비빈다고 한다.
산짐승의 행동에 이유가 있을 텐데 듣기에는 재미있고 신기하다.
언제나 그렇듯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다.
산길이 끝나는 즈음에 필례온천이 나온다.
규모는 크지 않다.
게르마늄 함량이 매우 높은 중탄산 노천온천이라고 한다.
필례약수는 1930년대 발견됐지만, 접근이 쉽지 않아 아는 이들만 찾던 곳이다.
1994년에 포장도로가 개통되면서 주목받았다.
필례약수는 위장병, 피부병, 숙취에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철분으로 인해 약간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약수터 주변은 울창한 숲이다.
외진 곳인데도 몇몇 정갈해 보이는 식당이 있다.
우리 일행이 들른 식당은 온천수로 지은 밥, 견과류를 넣은 미역국, 레몬청에 담근 사과 장아찌, 청갓나물, 황태구이 등을 내놓았는데 음식 맛이 구수하다.
산골에서 웬 호사인가 싶었다.
열심히 걷고 정직하게 산과 만난 뒤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으니 보약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인제천리길…보부상들이 다니던 사람길
인제천리길은 인제의 젊은이들이 조성한 걷기 좋은 길이다.
인제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군이지만 인구 밀도는 가장 희박하다.
설악산국립공원의 60%가량이 인제에 위치한다.
내린천이 인제를 관통해 소양강에 흘러든다.
경치가 아름답고 자연이 잘 보존된 땅이다.
인제 젊은이들이 옛사람의 자취, 역사, 문화가 서린 길들을 걷기 좋게 연결하고 정비하고 복원했다.
그 길의 코스가 20개나 되고, 길이는 400㎞ 남짓 된다.
이름하여 천리길이다.
마을과 마을을 이었던 길,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보부상의 소금길, 선비들이 감탄하던 설악길이다.
제1코스는 신남에서 인제까지 이어지는 소양강 옆길 20㎞이다.
제20코스는 인제군 남면 소치리-미약골-임도-신남으로 연결되는 고원임도길이다.
분단, 수몰, 수용에 의해 찻길, 물길이 우선되고, 마을 간 소통이 단절됐던 인제가 옛길 복원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걸으면서 역사를 만나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설악산, 점봉산, 방태산, 대암산, 금강산 등의 명산을 느낄 수 있다.
천리길 조성에 참여하는 인제 지역 주민은 약 30명이다.
이들은 군 지원과 자원봉사로 이 길을 정비하고 있다.
천리길 만들기를 시작한 지 벌째 4년 정도 됐다.
이들에게는 길을 만드는 원칙이 있다.
사람 사는 동네를 보여주고, 역사의 자취를 담는 길이 되도록 한다는 게 첫 번째다.
'흙길을 지향한다',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를 정리해 걷는 이들에게 제공한다'는 원칙도 중요시한다.
사람의 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나무들은 헐벗었다.
그렇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오히려 매력적이다.
대기는 유리처럼 차고 투명하다.
하늘은 푸르고 높다.
잎을 떨어뜨린 채 온몸을 드러낸 나목들 사이로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나그네는 철학자가 된다.
◇ 고즈넉한 겨울 산길의 손짓
인제천리길 20개 구간 중 열번째 구간은 가리산방재체험마을에서 시작해 대목령, 필례약수를 지나 군량분교까지 이어지는 12㎞의 둘레길이다.
필례약수터 길은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누구는 이 길이 남한에서 가장 멋진 단풍길이라고 극찬한다.
필례 단풍을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인제천리길 10구간에는 가벼운 겨울 산행의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코스인데도 사람의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았다.
원시림에 가까운 숲을 가로지른다.
제법 크고 긴데도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계곡을 한동안 끼고 걷는다.
약간 어려운 오르막 구간이 있긴 하지만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걸으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10구간 출발점인 가리산방재체험마을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에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내 봉우리 중 대청봉(1,707m) 다음으로 높은 가리봉(1,518m)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여름 이 일대에서 유례없는 폭우로 7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억원의 재산피해가 난 뒤 방재 의식을 일깨우고자 조성됐다.
국내 유일의 방재체험마을이다.
재난대응, 구조, 피난, 안전지도만들기, 안전산행법 등을 체험하거나 배울 수 있다.
주로 초중등 학생 교육에 이용된다.
가리산방재체험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1.5㎞ 정도 걸으면 대목령으로 올라가는 산길 초입에 이른다.
좀 가다 보면 산길은 소로로 바뀐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길이 잘 구분되지 않기도 했다.
동행하며 코스를 설명해준 정준교 가리산방재체험마을 사무장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걷기 경험이 조금만 있어도 산길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인제천리길'이라고 씐 표지기가 짧은 간격으로 나뭇가지에 달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대목령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라 조금 힘들 수는 있겠다.
산길을 걸으려면 다리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한국등산레저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이기도 한 정 사무장은 "속도를 조절하면 된다"라는 답을 들려줬다.
평지를 걸을 때와 같은 힘을 들이면서도 편안한 느낌으로 산길을 오르려면 천천히 가면 된다는 것이다.
평지에서 걷던 빠른 속도로 산길을 가려고 욕심을 부리면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각자 체력에 맞는 페이스에 만족한다면 어떤 산길도 오를 수 있다는 게 정 사무장의 조언이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수 있는 산비탈의 좁은 오르막도 그의 충고대로 서두르지 않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길에 접어든 지 30∼40분쯤 지났을까.
맑디맑은 물이 제법 많은 양으로 흘러 아름다운 풍광에 다채로움을 더하는 계곡이 나왔다.
이름 없는 지류 계곡이라고 한다.
꽤 길고 큰 데도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설악산 주변에 워낙 빼어난 명승지가 많아서라고 한다.
유명세에 치여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계곡일수록 지역 주민들이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정 사무장의 말이 통찰력으로 다가온다.
가는 길 곳곳에 산짐승들의 배설물이 있었다.
약초를 캐는 이들은 산에 사는 동물들과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는데 이런 것들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고 한다.
◇ 대목령·필례령·큰눈이고개·은비령
거센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고사목들을 넘어 또박또박 걷다 보니 어느새 대목령이다.
이 고개는 필례령, 큰눈이고개, 은비령이라고도 불린다.
은비령이라는 명칭은 소설가 이순원의 동명 소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이 고갯마루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의 무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어여쁜 이름들이다.
필례라는 이름은 대목령 아래 필례약수터의 모양이 베 짜는 여인(필녀·匹女)의 형상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다.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에는 '필노', '필여'라는 표기로 등장한다고 한다.
도와주는 고개, 힘을 아껴주는 고개의 뜻이 있다.
즉 지름길이라는 말인데 옛날에는 이 길이 강원도 영서와 영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필례령은 동해안에서 만들어진 소금이 내륙 산골로 전해지던 '소금길'이었다.
양양에서 구운 소금, 말린 생선 등이 봇짐으로, 혹은 나귀와 소의 등에 실려 필례령을 넘어와 인제에서 곡식, 나물, 버섯 등으로 교환됐다고 한다.
대목령에 오르는 동안 기온은 평년보다 낮았지만, 좌우의 봉우리들이 막아주는지 바람은 세지 않았다.
기온이 최저 영하 6도였다고 하는데 체감온도가 낮지 않아 걷기가 즐겁고 쾌적했다.
대목령 옆 봉우리에 오르면 가리봉 일대를 360도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다.
멀리 대청봉까지 눈에 들어온다.
가리봉 정상이 하얗다.
눈이 아니라 상고대라고 한다.
정오가 되도록 녹지 않았다.
정상 부근은 역시 바람이 찬가 보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다.
길은 조금 얼었는데 미끄럽지 않다.
약간 얼어 울퉁불퉁하고 뽀스락거리는 지표가 등산화 바닥의 요철과 맞물려 오히려 미끄럼을 막아주는 것 같다.
걷기에 좋다.
오래전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집터, 돌담, 산죽 등이 눈에 띄었다.
50년도 훨씬 더 된 화전민 터이리라.
이곳이 앞서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고 활동 무대였다고 생각하니 정겹다.
누구도 긴 시간과 역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확인하는 흔적 같기도 하다.
나무 밑동에 회색 페인트 자국 같은 게 있다.
깊은 산 속 나무에 페인트칠이라니! 가당찮은 짐작이다.
정 사무장은 진흙에 뒹군 산짐승들이 등을 비비고 난 뒤 남은 자취라고 한다.
산짐승들은 한 번 비빈 자리를 다시 찾아 그곳에 등을 비빈다고 한다.
산짐승의 행동에 이유가 있을 텐데 듣기에는 재미있고 신기하다.
언제나 그렇듯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다.
산길이 끝나는 즈음에 필례온천이 나온다.
규모는 크지 않다.
게르마늄 함량이 매우 높은 중탄산 노천온천이라고 한다.
필례약수는 1930년대 발견됐지만, 접근이 쉽지 않아 아는 이들만 찾던 곳이다.
1994년에 포장도로가 개통되면서 주목받았다.
필례약수는 위장병, 피부병, 숙취에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철분으로 인해 약간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약수터 주변은 울창한 숲이다.
외진 곳인데도 몇몇 정갈해 보이는 식당이 있다.
우리 일행이 들른 식당은 온천수로 지은 밥, 견과류를 넣은 미역국, 레몬청에 담근 사과 장아찌, 청갓나물, 황태구이 등을 내놓았는데 음식 맛이 구수하다.
산골에서 웬 호사인가 싶었다.
열심히 걷고 정직하게 산과 만난 뒤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으니 보약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인제천리길…보부상들이 다니던 사람길
인제천리길은 인제의 젊은이들이 조성한 걷기 좋은 길이다.
인제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군이지만 인구 밀도는 가장 희박하다.
설악산국립공원의 60%가량이 인제에 위치한다.
내린천이 인제를 관통해 소양강에 흘러든다.
경치가 아름답고 자연이 잘 보존된 땅이다.
인제 젊은이들이 옛사람의 자취, 역사, 문화가 서린 길들을 걷기 좋게 연결하고 정비하고 복원했다.
그 길의 코스가 20개나 되고, 길이는 400㎞ 남짓 된다.
이름하여 천리길이다.
마을과 마을을 이었던 길,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보부상의 소금길, 선비들이 감탄하던 설악길이다.
제1코스는 신남에서 인제까지 이어지는 소양강 옆길 20㎞이다.
제20코스는 인제군 남면 소치리-미약골-임도-신남으로 연결되는 고원임도길이다.
분단, 수몰, 수용에 의해 찻길, 물길이 우선되고, 마을 간 소통이 단절됐던 인제가 옛길 복원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걸으면서 역사를 만나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설악산, 점봉산, 방태산, 대암산, 금강산 등의 명산을 느낄 수 있다.
천리길 조성에 참여하는 인제 지역 주민은 약 30명이다.
이들은 군 지원과 자원봉사로 이 길을 정비하고 있다.
천리길 만들기를 시작한 지 벌째 4년 정도 됐다.
이들에게는 길을 만드는 원칙이 있다.
사람 사는 동네를 보여주고, 역사의 자취를 담는 길이 되도록 한다는 게 첫 번째다.
'흙길을 지향한다',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를 정리해 걷는 이들에게 제공한다'는 원칙도 중요시한다.
사람의 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