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병·정신대 동원 피하거나 영장 나온 부친 대신 끌려가
헌병 감시 속 노역 못견뎌 3명 탈출…9명은 해방 후 풀려나
꽃다운 나이였던 1940년대 일본육군 조병창 노동자로 강제동원된 이들이 조병창으로 들어간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일제 경찰의 지원병 강요를 견디다 피해 조병창에 입소한 어린 소년도 있고, 입대 영장이 나온 아버지를 대신해 조병창에 끌려간 아들도 있었다.

누구는 근로정신대 동원을 피하기 위해, 또 누구는 공부를 시켜준다거나 봉급을 많이 준다는 말에 속아 무기 제조공장인 조병창에 들어갔다.

이상의 인천대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보면 조병창에 들어갈 당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노동자는 17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인 13살 어린이 때 조병창에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출신 지역도 전국에 걸쳐져 있었다.

이들 12명이 강제동원될 때 살던 지역을 보면 경기·경북·서울·인천·전북·충남 등지로 다양했다.

일본육군 조병창이 문을 연 직후에는 모집이나 행정기관의 알선 형태로 조선인 노동자를 모은 적도 있지만, 말만 모집일 뿐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특히 국민징용령이 시행된 1944년 9월부터는 징용 영장을 통해 본격적인 강제동원이 시작됐다.

1945년 1월 강제동원된 김학수(90)씨는 아버지 앞으로 징용 영장이 나오자 대신 동원됐다고 털어놨다.

아버지가 끌려가면 6남매나 되는 가족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던 윤용관(90)씨 역시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같은 반 반장과 함께 조병창에 차출됐다.

전국 각지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병창 내 1·2·3공장이나 의무과에 배치돼 일했다.

1공장에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수탈한 놋그릇과 놋수저, 엽전 등 금속품을 용광로에 녹이는 주물작업이 이뤄졌다.

2공장에선 그렇게 만들어진 쇠를 깎고 3공장에선 조립을 했다.

조병창 내 배수로 공사나 물건 하역 작업, 굴 파기에 동원된 노동자들도 있었다.

각진 모양의 전투모에 군복 모양의 작업복을 입고 종일 일했지만 봉급은 턱없이 적었다.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노동자만 조선인이었을 뿐 공장 내 간부진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하루 치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간부에게 호되게 혼이 났고 밤늦게까지 잔업을 해야 했다.

지영례(91)씨는 "조병창 간부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고위직은 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다니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조병창장이 100m 앞에만 나타나도 경례를 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헌병이 쫓아와 경을 쳤다"고 구술했다.

생존자들은 그러나 조병창에서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우식씨는 "기능자 양성소에서 합숙할 때부터 먹는 것이 시원찮고 늘 배가 고팠다"며 "콩깻묵 같은 걸 쌀이랑 섞어서 주는데 배고프니까 싹싹 먹었다"고 말했다.

김상현(91)씨 역시 구술에서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았지만 받아서 뭔가 한 기억은 전혀 없고 무엇에 쓸 만한 액수가 안 됐다고 기억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부평 백마장 사택이나 아주 작은 단층 건물의 기숙사에 묵었다.

겨울에도 다닥다닥 붙은 방 사이에만 무연탄을 피워 바닥은 차갑고 벽만 따뜻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구술자 12명 중 3명은 견디다 못해 힘겹게 공장을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해방 이후에야 조병창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일단 들어가면 정해진 근무 기간도, 퇴직의 자유도 없었다.

감시가 삼엄한 데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막판에 치달아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져 올수록 공장은 더욱 쉴 틈 없이 돌아갔다.

현재 일본육군 조병창 시설이 남아 있는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은 오염 토양 정화를 거쳐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인천시에 반환될 예정이다.

인천시는 역사의 아픈 기억도 남겨 보존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일본육군 조병창을 보존해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