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란 헌법과 법률, 법관의 직업적 양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며 다수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법원 주변에는 개별 재판에 관한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때론 자신들의 요구가 ‘국민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개별 재판의 결론을 규정하는 국민의 명령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영국의 제임스 1세는 1608년 재판을 해보겠다며 에드워드 커크 대법관에게 법관의 가발과 법복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커크 대법관은 “재판은 법관의 직무”라며 거절했다. 제임스 1세는 “신이 주신 지혜로 왕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데 재판할 자격은 없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당시엔 왕권신수설이 신봉되고 있었으며 절대군주는 곧 주권자였다. 커크 대법관은 “왕은 하늘로부터 한없는 지혜와 천부적 재능을 받았지만, 자연적 이성만으로는 법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전문적인 훈련과 실무 경험을 거쳐 자격을 갖춘 법관만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끝까지 거절했다(황밍허 <법정의 역사>). 커크 대법관이 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재판의 독립성과 비당파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주권자가 왕에서 국민으로 바뀌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 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주권자의 의지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왕과 달리 관념적 존재인 국민이 과연 ‘단일한 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부터 다퉈졌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국민의 뜻을 판독해 선언할 것인지는 국민주권주의하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신탁을 독점하는 자는 신의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시민혁명 성공 이후 일부 혁명지도자는 자신의 의지가 곧 국민의 뜻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것은 과거 절대군주가 “짐이 곧 국가”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오히려 정당화되기 어려웠다.

한때 대학생의 필독서였던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 인민재판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지식인 청년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불리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기름진 얼굴과 흰 손이 반혁명적 지주의 자식이며 계급의 적이라는 증거라고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 지도자 펑파이는 김산에게 “의심날 때는 더 적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죽여야 한다”고 얘기한다. 수십 년 뒤 인민군 지배하의 이 땅에서도 인민재판이 있었고 다시 수십 년 뒤 크메르에서 비슷한 방식의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인민재판은 주권자인 인민이 직접 주권자의 의지로써 재판하겠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역사의 고비마다 특별법원이 등장했다. 나치가 설치한 특별법원의 이름 역시 인민법원(Volksgerichtshof)이었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알려진 숄 남매가 이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다. 한국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라 비상군법회의라는 특별법원이 설치돼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됐다.

이런 특별법원과 그 재판의 결론들이 과연 국민의 진정한 뜻을 반영한 것일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이런 법원의 설치에 찬성했고, 국민의 이름으로 재판한다는 대의에 공감했다.

‘진정한 국민의 뜻’ 내지 ‘주권자의 일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없다. 매우 불완전하지만 그나마 차선책이 선거(또는 투표)다. 한편 역사적 검증을 거쳐 ‘적어도 이 부분은 진정한 국민의 뜻으로 확인됐다’고 널리 받아들여진 원칙과 가치가 존재한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인권보장과 같은 핵심적 이념들이다.

이에 따라 일정한 중요 공직은 선거를 통해 담당자를 선출한 뒤 선거에서 확인된 국민의 뜻을 당분간(적어도 다음 선거까지) 능동적으로 수행하게 하되, 사법부는 선출하지 않는 공직자에게 맡겨 개별 선거로 움직일 수 없는 핵심적 원칙과 가치를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 현대 민주국가가 이런 헌법적 설계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법원은 주권자의 의지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다.

과거 “이것이 국민의 명령이다”고 선언했던 사람들은 좌파에도, 우파에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체주의자였으며 많은 국민에게 고통을 줬다. 무엇이 국민의 뜻인지를 깨닫고 진실로 그 중심을 놓치지 않기는 대단히 어렵다. 지나친 확신보다 마음을 비운 진지한 탐구와 경청이 요결(要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