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24) 슈뢰더 "北에 축구중계료 정치적 위험에도 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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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방정책 추진과정서 서독 내 갈등 격렬…韓, 서서갈등 극복 참고해야"
"비전과 실용의 균형이 중요…실용 어렵지만 '작은 발걸음'으로"
"韓 5년 단임제 정치체제서 대북정책 지속성 어려워"
"동독 소외·극우문제, 경제격차보다 심리…외국인 접하지 못해 난민 두려움 커"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 속에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왔습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작은 울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8개의 관련 주제로 연재해왔습니다.
지난 5일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 과정과 극우 부상 등 통일 후유증'을 주제로 8번째 시리즈의 기사 5개를 연재중입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 마지막 기사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며 '서독의 기억' 연재를 마칩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정치+문화연구소'의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
(20) '웬 교류·통일?'…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장벽에 묻는다
(21) 20대서 극우당 1위에 당황한 獨…장벽시대로 돌아가 해법찾기
(22) "청년 극우서도 참여 에너지 찾아야"…옛동독 저항세력 시선
(23) 前동독총리 "동독 악마화가 문제…심리장벽의 원인"
(24) 슈뢰더 "北에 축구중계료 정치적 위험에도 줬다면" ←←
"최근 평양에서의 남북한 축구 경기와 관련해 남측이 북측과 중계권료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때 초래할 수 있는 유엔 제재 위배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고 진전을 모색해볼 기회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으로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유엔 제재로 북한에 현금을 줄 수 없어서 중계가 무산됐다"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의 주장에 대한 보도 내용을 근거로 밝힌 견해다.
이 자체 사안의 중요성보다 '비전'과 '실용'의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든 예이다.
"실용을 추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대북정책의 경우 악조건에서도 "중단 없이 해야 한다"는 조언을 전하는 과정에서였다.
베를린에서 슈뢰더 전 총리를 인터뷰하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지난해 10월 첫 인터뷰와 비교해 정치적 민감도가 있는 한국 상황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만큼 한국 상황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부인은 한국인 김소연 씨로 지난해 결혼했다.
그가 소속된 중도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최근 몇 년 간 급속히 지지층을 잃고 있는데 대해서도 지난 인터뷰에서는 언급을 꺼렸지만, 이번에는 원인 분석 등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승부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리 재임 기간에 진보정책과는 거리가 있는 노동정책인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였다.
통일 후 경제난으로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까지 들었던 독일은 슈뢰더 전 총리의 재임 기간 상황이 반전됐다.
독일 통일 시 화폐통합 과정에서 옛 동독지역 대량실업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돼온 동서독 마르크의 '일대일 교환' 정책에 대해서도 자신과 반대 진영인 당시 기독민주당 소속 헬무트 콜 총리의 선택이 "경제적으로는 틀렸지만, 정치적으로는 옳았다"며 승부사적 기질을 드러냈다.
'흙수저'로 자수성가한 슈뢰더 전 총리는 한국의 젊은 세대에서 경제적인 우려 등으로 통일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것과 관련, "젊은 세대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서독 내 정파, 정당, 진영 간 갈등에도 동서독 교류·협력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 분단기에 통일의 초석을 닦게 된 것은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유럽이 당면한 현실을 잘 인식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경계에 대해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특히 오데르-나이세 강 동부지역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서독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1970년대 야당인 (중도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은 오데르-나이세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도진보 성향인) 사회민주당 소속의 브란트 총리는 본격적으로 대(對)동독 정책을 펼치기 전에 소련, 폴란드와의 화해를 추진했다.
동서독 교류·협력을 위한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경 인정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국경 문제를 놓고 사민당과 기민당 간에 논쟁은 극심했다.
서로 큰 상처를 입힐 정도로 격렬한 갈등이었다.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극심한 갈등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슈미트 총리 다음으로 기독민주당의 헬무트 콜이 총리직에 오른 뒤에도 신동방정책을 계승했다.
이 때문에 교류·협력이 계속됐고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의 협상에서 통일을 승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도 받아 결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됐다.
통일을 가능하게 한 국제적인 협상이 성공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옛 동독시민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노력을 통일을 위해 했기 때문이다.
또,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된 점도 크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여야 간 갈등이 있을 때 여당은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야당도 이런 대화 구조 속에서 있어야 정권이 교체되도 합리적으로 정책이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당시 서독의 방식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판단할 수 없다.
-- 슈뢰더 전 총리에 대해선 이상적인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 하르츠 개혁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같은 사민당 출신인 브란트 전 총리도 이상주의자인듯하지만 철저한 현실주의에 입각했던 것 같다.
브란트 전 총리가 동서독 간의 갈등과 서서갈등을 이겨내고 동서독 관계 정상화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도 실제적인 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이상주의와 현실과의 균형을 어떻게 추구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
▲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당시 사민당은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책임감 있고 현실감 있는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비전, 한편으로는 실용성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다.
비전 속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실천하려 했다.
비전과 실용주의의 균형이 중요했다.
민주주의 국가는 경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평화로운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비전을 현실주의에서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도식적으로 사고하면 안 된다.
브란트와 슈미트, 그리고 나 역시 비전을 내세우되 실용적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얻었다.
하르츠 개혁도 이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에 '오직 꿈꾸는 자만이 행동할 수 있다'(Nur wer den Mut hat zu traumen, hat die Kraft zu handeln)는 말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비전과 실용에서 중간을 찾아야 한다.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통일 29주년인데,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3일 통일의 날 기념식에서 "통일이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남은 과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론조사에서 보면 옛 동독지역 주민들의 과반은 '2등 시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아직 동서독 지역 간 격차가 있지만, 심리적인 문제까지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 통일이 진행형이라는 말은 맞는 표현이다.
도로, 항공, 교육 등의 인프라는 현재 옛 동독지역이 옛 서독지역보다 좋기도 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도 옛 동독지역이 상당히 개선됐다.
물론,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함부르크 같은 잘사는 도시와는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옛 동독의 작센주(州)는 겔젠키르헨 등 루르 공업지역보다 실업률 등에서 사정이 더 좋다.
그런데 주관적, 심리적 부분에서는 격차가 크다.
객관적인 상황은 괜찮은데 왜 심리적인 실제 체감도는 다를까.
이는 통일 과정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먼저 통일 초기 현상으로 옛 동독지역의 젊은이들이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기 위해 서독으로 몰려갔다.
남아있는 장년층은 '나는 패배자인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옛 동독지역에서 일자리가 급격히 없어졌는데, 신규 일자리가 생기는 속도가 느렸다.
라이프치히 인근 지역에서 IT 분야,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에서는 제조업 분야에서 신규 일자리가 창출됐는데, 서독인들이 일자리를 꿰차는 경향도 있었다.
이런 느낌이 한꺼번에 상쇄되기는 어렵다.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심리적 장벽은 이런 실망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더구나 동독체제는 국가가 모두 책임졌는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아 새로 적응을 해야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외국인 문제의 경우, 서독은 터키와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왔다.
시민들이 외국인에 익숙했다.
그러나 동독은 쿠바와 베트남에서 소수의 노동자가 들어왔다.
일반 시민들이 이들과 접촉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정서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난민을 대거 받아들인 메르켈 총리의 이민정책으로 시민들이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커지게 됐다.
그런데, 미디어에서 옛 동독지역의 극우 성향만 보도하는 경향도 있다.
드레스덴에서 극우 조직 '페기다'가 만들어지고 매주 시위를 하는데, 이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도 많다.
이민자 정책에 더 관대해야 한다는 시위가 열리는데, 이런 것은 미디어를 통해 쉽게 전달이 안 된다.
--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옛 동독지역 선거에서 약진하면서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민당과 사민당 등 국민정당의 퇴조 현상도 뚜렷하다.
▲ 서독 시절에 좌파 정당인 사민당보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세력이, 우파 정당인 기민·기사당 연합보다 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세력이 있었는데, 모두 약했다.
특히 친(親)나치 성향을 보인 극우는 사회적으로 배척을 당했다.
통일 이후에는 북유럽 등처럼 정당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국민정당은 사회가 갈수록 분화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굉장히 분화하는 데 한 집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사민당과 기민당 모두 같은 위기에 처해있다.
사민당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
녹색당이 생태 이슈로 사민당의 지지층을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와 환경이 중요한 이슈지만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이슈들이 많다.
경제 현안, 중동 문제, 브렉시트, EU 통합 등의 문제가 쌓여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 한반도 상황과 비교했을 때 분단기 독일에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분단기 진영 간 '서서갈등' 속에서도 최소한의 합의점을 찾아 정권교체에도 신동방정책을 이어갔던 사회적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의원내각제이고 다당제에 적합한 선거제도다.
▲ 질문한 부분들이 독일 통일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통일 문제에서 통일이라는 목표지점에 대해선 정치권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서 논란이 있었다.
슈미트의 사민당에서 콜의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신동방정책을 이어받았을 때 콜이 "이전에 내가 잘못 생각했어"라고 한 게 아니다.
당시 기민당의 연정파트너는 이전의 사민당의 파트너인 (친기업성향의) 자유민주당이었다.
자민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에서 해온 신동방정책을 기민당과의 연정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한국의 5년 단임제에서는 정책을 실천으로 옮기고 연속성을 가져가는 데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정치체제에서는 야당이 정부·여당과의 공통점보다는 반대의 특성을 더 강조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 흑백논리가 앞서게 되면 더욱 대북정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게 된다.
흑백논리의 사고방식은 국가에 상당히 위험요소다.
--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에 대해 조언해줄 것은 없는가.
▲ 남북한이 상호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남측에서 정당 간에 '통일'이라는 대의명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합의가 돼 있고, 정책의 실행 속도와 우선순위 등 세부적인 실행방안에서 논란이 있는 것이라면 대화를 통해 갈등을 극복할 기회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것에 접근하는 프로세스 자체에 다른 생각이라면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인터뷰 초반에 이야기한 비전과 실용에 대해 다시 강조하겠다.
비전은 '통일'이고 실용은 '남북한 간의 관계에서의 발걸음'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이 '발걸음', 실용이다.
이런 발걸음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물론 실용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최근 북한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간의 축구 경기가 중계권료 관련 협상 문제로 중계를 할 수 없었다는 보도들이 있었다.
(보도 내용이 맞는다면) 물론 남측이 북측과의 중계권료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때 관련 결정이 초래할 수 있는 유엔 제재 위배 논란 때문에 남측이 결정하기에 정치적 위험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그런데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 진전을 모색해 볼 기회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실망했다는 것이다.
또, 독일 통일 과정을 참고하면, 미국 등 강대국들은 아주 신속한 성공을 원한다.
특히 정치인 출신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북한이 통일이라는 비전을 머릿속에 둔 채 '작은 발걸음'의 실천을 중단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남북한의 상황은 동서독과 엄청나게 다르다.
동독지역 시민들은 완벽히 고립되지 않았었다.
알다시피 연금수령자는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고, 서독 TV를 볼 수 있는 지역도 많았다.
북한은 1인 지배체제다.
주민의 눈치를 안 봐도 되지만, 한국은 국민의 반응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반응도 감안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 등 한국 정부가 북한을 상대하는 것은 과거 서독이 동독을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건 사실이다.
-- 옛 동독지역에서 청년 세대들이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급속하게 커지고 있다.
부모 세대의 동서독 격차 문제가 자녀 세대로까지 이전되고 있다는 불만도 있는데.
▲ 옛 동독지역 20대들이 자신감이 없거나 그렇지 않다.
한국의 경우 젊은 세대가 만일 통일에 관심이 없고 반대한다면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부모 세대는 급속히 성장하는 사회에서 활동했는데, 아이들은 그러한 성장신화의 환경에 있지 않다.
아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더 교육을 받았는데도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특히 한국의 교육은 굉장히 팍팍하기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위험하다.
젊은 층은 통일이 됐을 때 옛 동독지역 일부 시민들이 난민에 대해 느끼는 것처럼 '내 것을 나눠야 하는가'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게 급선무다.
#서독의기억
/연합뉴스
"비전과 실용의 균형이 중요…실용 어렵지만 '작은 발걸음'으로"
"韓 5년 단임제 정치체제서 대북정책 지속성 어려워"
"동독 소외·극우문제, 경제격차보다 심리…외국인 접하지 못해 난민 두려움 커"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 속에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의 교류·협력과 통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왔습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작은 울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8개의 관련 주제로 연재해왔습니다.
지난 5일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 과정과 극우 부상 등 통일 후유증'을 주제로 8번째 시리즈의 기사 5개를 연재중입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 마지막 기사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며 '서독의 기억' 연재를 마칩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정치+문화연구소'의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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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웬 교류·통일?'…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장벽에 묻는다
(21) 20대서 극우당 1위에 당황한 獨…장벽시대로 돌아가 해법찾기
(22) "청년 극우서도 참여 에너지 찾아야"…옛동독 저항세력 시선
(23) 前동독총리 "동독 악마화가 문제…심리장벽의 원인"
(24) 슈뢰더 "北에 축구중계료 정치적 위험에도 줬다면" ←←
"최근 평양에서의 남북한 축구 경기와 관련해 남측이 북측과 중계권료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때 초래할 수 있는 유엔 제재 위배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고 진전을 모색해볼 기회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으로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유엔 제재로 북한에 현금을 줄 수 없어서 중계가 무산됐다"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의 주장에 대한 보도 내용을 근거로 밝힌 견해다.
이 자체 사안의 중요성보다 '비전'과 '실용'의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든 예이다.
"실용을 추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대북정책의 경우 악조건에서도 "중단 없이 해야 한다"는 조언을 전하는 과정에서였다.
베를린에서 슈뢰더 전 총리를 인터뷰하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지난해 10월 첫 인터뷰와 비교해 정치적 민감도가 있는 한국 상황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만큼 한국 상황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부인은 한국인 김소연 씨로 지난해 결혼했다.
그가 소속된 중도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최근 몇 년 간 급속히 지지층을 잃고 있는데 대해서도 지난 인터뷰에서는 언급을 꺼렸지만, 이번에는 원인 분석 등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승부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리 재임 기간에 진보정책과는 거리가 있는 노동정책인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였다.
통일 후 경제난으로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까지 들었던 독일은 슈뢰더 전 총리의 재임 기간 상황이 반전됐다.
독일 통일 시 화폐통합 과정에서 옛 동독지역 대량실업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돼온 동서독 마르크의 '일대일 교환' 정책에 대해서도 자신과 반대 진영인 당시 기독민주당 소속 헬무트 콜 총리의 선택이 "경제적으로는 틀렸지만, 정치적으로는 옳았다"며 승부사적 기질을 드러냈다.
'흙수저'로 자수성가한 슈뢰더 전 총리는 한국의 젊은 세대에서 경제적인 우려 등으로 통일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것과 관련, "젊은 세대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서독 내 정파, 정당, 진영 간 갈등에도 동서독 교류·협력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 분단기에 통일의 초석을 닦게 된 것은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유럽이 당면한 현실을 잘 인식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경계에 대해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특히 오데르-나이세 강 동부지역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서독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1970년대 야당인 (중도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은 오데르-나이세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도진보 성향인) 사회민주당 소속의 브란트 총리는 본격적으로 대(對)동독 정책을 펼치기 전에 소련, 폴란드와의 화해를 추진했다.
동서독 교류·협력을 위한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경 인정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국경 문제를 놓고 사민당과 기민당 간에 논쟁은 극심했다.
서로 큰 상처를 입힐 정도로 격렬한 갈등이었다.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극심한 갈등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슈미트 총리 다음으로 기독민주당의 헬무트 콜이 총리직에 오른 뒤에도 신동방정책을 계승했다.
이 때문에 교류·협력이 계속됐고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의 협상에서 통일을 승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도 받아 결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됐다.
통일을 가능하게 한 국제적인 협상이 성공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옛 동독시민이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노력을 통일을 위해 했기 때문이다.
또,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된 점도 크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여야 간 갈등이 있을 때 여당은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야당도 이런 대화 구조 속에서 있어야 정권이 교체되도 합리적으로 정책이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당시 서독의 방식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판단할 수 없다.
-- 슈뢰더 전 총리에 대해선 이상적인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 하르츠 개혁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같은 사민당 출신인 브란트 전 총리도 이상주의자인듯하지만 철저한 현실주의에 입각했던 것 같다.
브란트 전 총리가 동서독 간의 갈등과 서서갈등을 이겨내고 동서독 관계 정상화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도 실제적인 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이상주의와 현실과의 균형을 어떻게 추구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
▲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당시 사민당은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책임감 있고 현실감 있는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비전, 한편으로는 실용성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다.
비전 속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실천하려 했다.
비전과 실용주의의 균형이 중요했다.
민주주의 국가는 경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평화로운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비전을 현실주의에서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도식적으로 사고하면 안 된다.
브란트와 슈미트, 그리고 나 역시 비전을 내세우되 실용적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얻었다.
하르츠 개혁도 이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에 '오직 꿈꾸는 자만이 행동할 수 있다'(Nur wer den Mut hat zu traumen, hat die Kraft zu handeln)는 말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비전과 실용에서 중간을 찾아야 한다.
--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통일 29주년인데,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3일 통일의 날 기념식에서 "통일이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남은 과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론조사에서 보면 옛 동독지역 주민들의 과반은 '2등 시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아직 동서독 지역 간 격차가 있지만, 심리적인 문제까지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 통일이 진행형이라는 말은 맞는 표현이다.
도로, 항공, 교육 등의 인프라는 현재 옛 동독지역이 옛 서독지역보다 좋기도 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도 옛 동독지역이 상당히 개선됐다.
물론,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함부르크 같은 잘사는 도시와는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옛 동독의 작센주(州)는 겔젠키르헨 등 루르 공업지역보다 실업률 등에서 사정이 더 좋다.
그런데 주관적, 심리적 부분에서는 격차가 크다.
객관적인 상황은 괜찮은데 왜 심리적인 실제 체감도는 다를까.
이는 통일 과정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먼저 통일 초기 현상으로 옛 동독지역의 젊은이들이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기 위해 서독으로 몰려갔다.
남아있는 장년층은 '나는 패배자인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옛 동독지역에서 일자리가 급격히 없어졌는데, 신규 일자리가 생기는 속도가 느렸다.
라이프치히 인근 지역에서 IT 분야,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에서는 제조업 분야에서 신규 일자리가 창출됐는데, 서독인들이 일자리를 꿰차는 경향도 있었다.
이런 느낌이 한꺼번에 상쇄되기는 어렵다.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심리적 장벽은 이런 실망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더구나 동독체제는 국가가 모두 책임졌는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아 새로 적응을 해야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외국인 문제의 경우, 서독은 터키와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왔다.
시민들이 외국인에 익숙했다.
그러나 동독은 쿠바와 베트남에서 소수의 노동자가 들어왔다.
일반 시민들이 이들과 접촉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정서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난민을 대거 받아들인 메르켈 총리의 이민정책으로 시민들이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커지게 됐다.
그런데, 미디어에서 옛 동독지역의 극우 성향만 보도하는 경향도 있다.
드레스덴에서 극우 조직 '페기다'가 만들어지고 매주 시위를 하는데, 이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도 많다.
이민자 정책에 더 관대해야 한다는 시위가 열리는데, 이런 것은 미디어를 통해 쉽게 전달이 안 된다.
--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옛 동독지역 선거에서 약진하면서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민당과 사민당 등 국민정당의 퇴조 현상도 뚜렷하다.
▲ 서독 시절에 좌파 정당인 사민당보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세력이, 우파 정당인 기민·기사당 연합보다 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세력이 있었는데, 모두 약했다.
특히 친(親)나치 성향을 보인 극우는 사회적으로 배척을 당했다.
통일 이후에는 북유럽 등처럼 정당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국민정당은 사회가 갈수록 분화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굉장히 분화하는 데 한 집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사민당과 기민당 모두 같은 위기에 처해있다.
사민당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
녹색당이 생태 이슈로 사민당의 지지층을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와 환경이 중요한 이슈지만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이슈들이 많다.
경제 현안, 중동 문제, 브렉시트, EU 통합 등의 문제가 쌓여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 한반도 상황과 비교했을 때 분단기 독일에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분단기 진영 간 '서서갈등' 속에서도 최소한의 합의점을 찾아 정권교체에도 신동방정책을 이어갔던 사회적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의원내각제이고 다당제에 적합한 선거제도다.
▲ 질문한 부분들이 독일 통일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통일 문제에서 통일이라는 목표지점에 대해선 정치권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서 논란이 있었다.
슈미트의 사민당에서 콜의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신동방정책을 이어받았을 때 콜이 "이전에 내가 잘못 생각했어"라고 한 게 아니다.
당시 기민당의 연정파트너는 이전의 사민당의 파트너인 (친기업성향의) 자유민주당이었다.
자민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에서 해온 신동방정책을 기민당과의 연정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한국의 5년 단임제에서는 정책을 실천으로 옮기고 연속성을 가져가는 데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정치체제에서는 야당이 정부·여당과의 공통점보다는 반대의 특성을 더 강조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 흑백논리가 앞서게 되면 더욱 대북정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게 된다.
흑백논리의 사고방식은 국가에 상당히 위험요소다.
--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에 대해 조언해줄 것은 없는가.
▲ 남북한이 상호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남측에서 정당 간에 '통일'이라는 대의명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합의가 돼 있고, 정책의 실행 속도와 우선순위 등 세부적인 실행방안에서 논란이 있는 것이라면 대화를 통해 갈등을 극복할 기회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것에 접근하는 프로세스 자체에 다른 생각이라면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인터뷰 초반에 이야기한 비전과 실용에 대해 다시 강조하겠다.
비전은 '통일'이고 실용은 '남북한 간의 관계에서의 발걸음'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이 '발걸음', 실용이다.
이런 발걸음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물론 실용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최근 북한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간의 축구 경기가 중계권료 관련 협상 문제로 중계를 할 수 없었다는 보도들이 있었다.
(보도 내용이 맞는다면) 물론 남측이 북측과의 중계권료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때 관련 결정이 초래할 수 있는 유엔 제재 위배 논란 때문에 남측이 결정하기에 정치적 위험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그런데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 진전을 모색해 볼 기회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실망했다는 것이다.
또, 독일 통일 과정을 참고하면, 미국 등 강대국들은 아주 신속한 성공을 원한다.
특히 정치인 출신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북한이 통일이라는 비전을 머릿속에 둔 채 '작은 발걸음'의 실천을 중단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남북한의 상황은 동서독과 엄청나게 다르다.
동독지역 시민들은 완벽히 고립되지 않았었다.
알다시피 연금수령자는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고, 서독 TV를 볼 수 있는 지역도 많았다.
북한은 1인 지배체제다.
주민의 눈치를 안 봐도 되지만, 한국은 국민의 반응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반응도 감안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 등 한국 정부가 북한을 상대하는 것은 과거 서독이 동독을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건 사실이다.
-- 옛 동독지역에서 청년 세대들이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급속하게 커지고 있다.
부모 세대의 동서독 격차 문제가 자녀 세대로까지 이전되고 있다는 불만도 있는데.
▲ 옛 동독지역 20대들이 자신감이 없거나 그렇지 않다.
한국의 경우 젊은 세대가 만일 통일에 관심이 없고 반대한다면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부모 세대는 급속히 성장하는 사회에서 활동했는데, 아이들은 그러한 성장신화의 환경에 있지 않다.
아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더 교육을 받았는데도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특히 한국의 교육은 굉장히 팍팍하기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위험하다.
젊은 층은 통일이 됐을 때 옛 동독지역 일부 시민들이 난민에 대해 느끼는 것처럼 '내 것을 나눠야 하는가'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게 급선무다.
#서독의기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