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주도…美 압박·중일관계 개선이 논의진전 이끌어
아태 16개국 '메가 FTA' RCEP…태동에서 타결까지
태국 방콕에서 4일 타결된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은 세계 최대 규모의 '메가 FTA(자유무역협정)'로 불린다.

RCEP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 등 16개 나라가 참여한 아시아태평양지역 FTA다.

이번 타결에서 인도가 주춤했지만 RCEP가 목표대로 발효하게 되면 역내 인구는 36억 명에 달하고, 참여국의 GDP(국내총생산) 합계는 세계 전체의 32%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거대한 자유무역협정 구상이 태동하고 지난한 협상을 거쳐 타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는 글로벌 강국의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투영돼 있다.

과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절 미국 정부는 일본, 호주, 캐나다 등을 핵심 동맹국과 우방국을 주축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아우르는 세계 최대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

중국은 자국을 배제한 TPP를 중국의 세력 확장을 막고 포위하는 '경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로 간주했다.

이에 중국은 TPP에 맞서 메가 FTA인 RCEP 협상을 주도했다.

RCEP 협상은 2012년 11월 정식으로 시작됐다.

즉, 미국과 중국이 각자 TPP와 RCEP를 앞세워 자국 주도의 경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치열한 세력전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 질서 구축 싸움의 양상은 초반에는 미국에 유리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절까지만 해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등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 등을 주축으로 하는 TPP 진영의 논의가 한층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반면 RCEP 논의에는 중국, 일본, 인도 등 이질적인 성격의 국가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들 국가 간의 외교·정치적 갈등도 논의 진행에 발목을 잡곤 했다.

특히 세계 2∼3위 경제 대국으로 RCEP 논의의 핵심국인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 영유권 분쟁으로 장기간 관계가 경색되면서 협상이 수년간 지지부진했다.

각국 간에 상품·서비스 개방 수준 등을 놓고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는 점도 협상 구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후 국제 정치 환경이 급속히 변화한 가운데 RCEP 논의는 극적으로 급진전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미국의 전방위 압박 속에서 중국이 RCEP 조기 타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 것이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작년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한 이래로 미국이 통상, 기술, 안보, 인권 등 전방위에 걸쳐 중국을 강력히 압박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팽창 전략과 미국의 억지 전략 사이에서 빚어지는 충돌의 일환이라고 보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나아가 중국과 미국의 새로운 대결 구도를 '신냉전'의 틀로 분석하거나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이 반드시 충돌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비유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국이 거대한 차이나 머니를 앞세운 경제권 확장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로까지 영향력을 넓혀가자 미국은 일대일로를 '빚의 함정'이라고 비난하면서 중국의 영향력 차단에 주력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봉쇄망을 뚫고 나갈 '활로'를 찾는 것이 시급한 실정이다.

RCEP 논의에는 미국의 핵심 우방인 일본과 한국, 중국과 오랜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과 가까운 인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이들 국가까지 한 경제 진영으로 묶는 RCEP 협상 타결이 미국의 대중 포위망을 약해지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구체화해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데 RCEP 논의에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최전선 핵심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한편, 작년부터 훈풍이 부는 중일 관계는 RCEP 논의 진전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작년 10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방중을 계기로 중일 양국이 2012년 센카쿠 영유권 분쟁 이후 얼어붙었던 양국 관계를 정상 궤도로 올렸다고 선언했다.

RCEP 협상이 시작된 이래 이달까지 16차례의 장관급 회의와 3차례의 정상회담을 포함, 총 28차례 공식 협상이 열렸다.

2018년 11월 2차 장관회의에서는 RCEP가 최종 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하고, 2019년 타결을 결의했다.

국제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당초 TPP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적 구상을 가졌지만 미국이 TPP에서 빠져나가면서 중국이 만드는 일대일로 블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에서는 일본, 유럽연합, 한국 등 핵심 동맹국들까지 거칠게 밀어붙이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압박성 외교 방식이 중국이 이들 국가에 손을 뻗칠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우방을 포함한 세계 각국을 무역 문제로 압박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신고립주의 노선으로 기운 미국이 빠져나가면서 TPP 논의는 사실상 동력을 상실함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경제 세력 구축 싸움이 중국의 '뒤집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