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역할놀이…연극 '이갈리아의 딸들'
"이갈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록달록 차려입은 사람들이 런웨이로 쏟아진다.

남자들은 곱게 화장하고 치마와 하이힐을 착용했고, 여자들은 민얼굴에 단화와 바지정장 차림이다.

30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개막한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은 전복의 신선함을 안기는 무대였다.

극단 신세계 대표 김수정 연출이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1977년작 소설을 각색해 재기발랄한 문제작 한편을 완성했다.

연출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성 역할을 모두 뒤집고 출발한다.

일종의 미러링이다.

이갈리아는 여자가 사회활동을 하고 남자는 육아를 전담하는 '가모장제'의 나라다.

남성은 성기 가리개 'X브라'를 착용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어디 남자가"라는 말로 지탄받는다.

성 상품화, 부부강간, 데이트폭력, 미투 운동, 노브라 논쟁 등 한국사회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2시간 45분 동안 이어진다.

듣기만 해도 논쟁적인 소재지만 위트 넘치는 대사와 배우들의 만화 같은 연기, 희극적 분위기를 살리는 연출이 한데 섞이면서 부담을 덜어낸다.

원작의 언어 체계는 한국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바꿨다.

예컨대 원작에서 여성을 일컫는 '움'(Wom)과 남성을 지칭하는 '맨움'(Manwom)은 그냥 '여자'와 '남자'로, 성기 가리개인 '페호'는 'X브라'로 대체했다.

이갈리아에서 약자인 남성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산다.

소년은 구원자라고 생각한 연인에게 너무 사랑한다는 이유로 폭행당한다.

강간당한 아들은 부모에게 오히려 "왜 그런 옷 입고 밤늦게 다녔냐"고 힐난을 받는다.

성폭행당한 사실을 언론에 알린 남성 국회의원에게 쏟아지는 건 위로가 아닌 "유난스럽게 예민하다"는 손가락질이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김수정 연출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사회에 치열한 논쟁을 일으킨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해 관객들에게 던져놓는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배우의 '몸'이다.

몸은 그 자체로 언어가 된다.

분홍색과 하이힐, 치마에 갇힌 남성 배우들의 몸가짐은 한없이 조심스럽다.

반대로 통념에서 놓여난 여성 배우들은 쩌렁쩌렁 목소리를 높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수정 연출은 "여성성도 남성성도 모두 희화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옷을 바꿔 입고 나니까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 그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게 보이더라"고 설명했다.

작품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 역할 전복의 파격에 웃던 관객들은 어느덧 작품 속 괴로워하는 남성 배우들을 지켜보다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가모장제의 나라 이갈리아도 성이 권력이 될 때, 가부장제와 별다르지 않은 그늘이 진다.

작품 말미에 남성해방운동을 하던 소년들이 동성애자를 동료로 포섭할 것인지를 두고 분열하는 장면은 한 작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 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김수정 연출의 진정성과 배우들의 열연은 박수받을 만하다.

이들은 분명 관객들이 오래도록 곱씹을만한 고민거리를 던지는 데 성공했다.

가모장제의 나라 이갈리아든, 그 반대든, 미래에도 아이들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공연은 10월 1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열린다.

10월 25∼27일 대전예술의전당 공연도 이어진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