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로 국내 바이오기업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퍼질까 걱정됩니다. 아직 국내 기업의 글로벌 임상시험 능력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임상 3상 건수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실패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감수해야 우리 바이오산업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김선영 헬릭스미스 대표(사진)는 2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제 '엔젠시스(VM202-DPN)'의 미국 임상 3상 경과를 설명하기 위해 기자간담회를 열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해 두 달 안에 결과를 내놓을 계획이며 이번 임상은 '미완의 성공'이라고 자평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원래 목표로 했던 판매허가(BLA) 신청 시기보다 짧으면 10개월, 길면 15개월 늦을 것"이라며 "2022년 2월에 BLA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혼용 가능성 다각적으로 조사

김 대표는 "지금으로서는 약물 혼용 원인을 특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피험자에게 주입한 약물이 체내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 나타내는 약역학(PK) 데이터를 살펴보니 약물 혼용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된다"며 "위약군에게 약물을 주사하고 약물군에게 위약을 주사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지만 다른 요인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헬릭스미스는 병원, 약물 보관창고, 데이터 분석실, 생산시설 등 과실이 일어났을 만한 장소들을 모두 정밀 조사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임상 시스템에 오류가 있거나 임상수행기관이 규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임상 수행 과정에서 사람의 실수로 이런 일이 생겼을 확률이 가장 크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문제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특정 기관을 지목하면 추후 법적 소송에서 부담이 있을 수 있다"며 신중함을 드러냈다.

약물과 위약의 라벨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무리하게 임상을 진행했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김 대표는 "만약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다시는 미국 땅에 발을 못 들인다"며 "그것을 감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했다. 그는 "생산공장에서 라벨링 작업을 한 뒤 전수검사를 한다"며 "개인적으로 라벨링 이슈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전에 혼용 가능성을 알 수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답을 내놨다. 김 대표는 "이번 임상은 임상에 참여하는 의사, 간호사, 피험자, 임상시험수탁기관(CRO) 등 누구도 자기가 지금 주사하는 것이 약물인지 위약인지 모르는 '이중맹검'으로 이뤄졌다"며 "이중맹검이 풀리기 전까지 혼용 가능성을 알 방법은 없다"고 했다.

임상수행기관에서 임상시험이 잘 수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인 '오디트(audit)'가 잘 이뤄졌는지에 대해서 김 대표는 "몇 번이나 오디트를 수행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성실히 했다"며 "다만 오디트는 주로 서류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에 의한 실수를 잡아내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업계에서는 헬릭스미스가 CRO 관리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우리는 CRO에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3~4명의 인력이 CRO에서 전달하는 자료를 세심하게 검토했으며 CRO와 상시적으로 소통해왔다"고 밝혔다.

"후속 임상 할 가치 있다"

김 대표는 "이번 임상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고 거듭 힘줘 말했다. 그는 "임상 3상을 한 번 하는데 500억원이 든다"며 "500억원을 들여 후속 임상을 할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기 위해 이번 데이터를 냉정하게 따져봤다"고 했다.

전체 피험자 500명 가운데 데이터를 왜곡시키는 피험자 62명을 제외한 438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위약 대비 엔젠시스의 통증 완화 효과는 주사 후 3개월, 6개월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뛰어났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김 대표는 "이 데이터를 보는 순간 애통하기 그지없었다"며 "잘 마쳤으면 성공적이라고 할 만한 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헬릭스미스는 이번 임상에서 엔젠시스의 안전성은 확실히 입증했으며 통증 완화 효과뿐 아니라 신경 재생 효과까지 확인했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번 임상 결과를 분석했더니 후속 임상을 빨리 진행하라는 게 외부 전문가들의 조언"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이번 데이터를 BLA 신청에 활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번 임상 데이터를 정리해 올해 안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제출하겠다"며 "이 데이터를 BLA에 쓸 수 있는지 여부는 후속 임상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헬릭스미스는 임상 프로토콜을 정비하고 임상 관리 시스템을 개선해 이르면 내년 초부터 후속 임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 대표는 "이번 일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은 500명이 참여하는 임상시험을 관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라며 "피험자 규모를 150명가량으로 줄여 2~3건의 후속 임상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리리카와 뉴런틴을 개발한 화이자도 100~160명의 피험자가 참여하는 임상 5~6개를 한 다음 결과가 잘 나온 임상 몇 개를 골라서 BLA 신청 시 자료를 제출했다"고 덧붙였다.

임유 기자 free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