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막는 규제 푸는데 앞장서야
오상헌 경제부 차장
실제 그랬다. 양적으로 보면 1998년 5794만 개였던 취급물량은 지난해 25억4300만 개로 20년 동안 44배 늘었다. 질적인 성장도 못지않았다. 2~3일 걸리던 운송 기간이 한나절로 줄어들었는데도 운임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 모든 혜택은 소비자 몫으로 돌아왔다. 업체들이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에 전 국민은 값싸고 질 좋은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고, 누구든 세계 최고 수준의 택배 플랫폼을 활용해 창업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비하면 택배산업에서 창출된 수만 개 일자리는 그저 ‘덤’이다.
신생아이던 택배업을 대한민국의 ‘핵심 서비스 산업’이자 ‘일자리 보고’로 키운 숨은 주역은 공정거래위원회였다. 공정위는 “택배업 허가제는 업체 간 자유로운 경쟁을 막아 소비자 피해를 부를 수 있다”며 등록제로 전환하도록 주무 부처(건설교통부)를 압박했다. 또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등록 요건에서 ‘차량 수요와 공급의 적합성’ 등 객관적 기준이 없는 항목 삭제를 밀어붙였다. “다른 부처 법령에 있는 반(反)경쟁적 규제를 개혁해 소비자 효용을 끌어올리는 건 공정위의 핵심 업무”란 설명과 함께.
20여 년이 흐른 지금, 공정위의 ‘경쟁 주창자’ DNA는 그대로 남아있을까. 대다수 기업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난 5일 발표한 ‘공정거래 성과 조기 창출 방안’ 자료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공정위가 총괄한 이 자료에는 ‘중소기업 조합의 공동사업(수주·판매 등)에 대해 담합 적용을 면제해주는 내용의 중기조합법(2019년 8월 개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에 나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소비자 이익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정부 정책에 경쟁 원리를 확산시켜야 할 경쟁 주창자가 어떤 식으로든 담합을 허용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산업계에선 “20년 전의 공정위였다면 단칼에 거부했을 사안”(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이 일어난 원인을 ‘기울어진 균형추’에서 찾는다. 경쟁 촉진과 경제력 집중 억제 사이에서 중심을 잡던 공정위가 반대기업 분위기에 휩쓸려 경쟁 촉진이란 본연의 업무보다 대기업 갑질 근절 등 경제력 집중 억제에 더 많은 힘을 싣고 있다는 얘기다. “세계 주요국 경쟁당국의 정책 목표는 경쟁 촉진 하나뿐이다. 기업이 크다는 이유로 경쟁당국이 온갖 사전 규제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대기업의 하소연은 중소기업과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묻혔다.
‘규제 생산·집행 부처’로 바뀐 공정위가 다시 ‘규제 혁파의 주역’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지난 10일 취임한 조성욱 위원장은 “혁신 생태계 조성과 경쟁제한적 규제 발굴·개선에 힘쓰겠다”고 했다. 반가운 일이다. 지금처럼 촘촘한 규제 아래에선 정부가 그렇게도 바라는 일자리 창출도, 혁신 성장도 불가능하다. 20년 전 택배산업을 일으켜 세운 그런 공정위로 재탄생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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