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신간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
"내분 자멸설로는 발해 멸망 후 유민 저항 설명 못 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발해는 698년 건국해 926년 소멸했다.

발해 멸망에 관한 기록은 요사(遼史)에 나오는 "거란 태조가 그 갈린 마음을 틈타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내용이 전부라고 알려졌다.

이로 인해 발해는 내분이나 부패로 망했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신간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에서 발해 멸망 이후 지속해서 일어난 유민 저항을 주목하면, 내분 자멸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는 요사가 승자인 거란 측 사료라는 점에서 발해 대외관계사 규명에 제한이 있다면서 "발해는 마지막 왕인 대인선 시기에 전통적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방비 체계를 확고히 했고, 주변국과 교류하면서 압박해 오는 거란군 침략에 대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한반도에서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 남방 계열로 치우쳤고, 중원에서는 거란에 이어 금이 확장하면서 기존 중화사상의 변질을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기획한 책은 발해 멸망 이후 200여년간 부흥 운동을 펼친 발해 유민을 조명한다.

임상선 재단 연구위원은 발해국이 항복한 뒤 거란이 세운 동단국(東丹國)에 대한 논고에서 "동단국은 주민이 발해인이고, 요동(遼東)으로 천사(遷徙)된 뒤에도 이곳에서 발해 부흥 운동이 꾸준히 일어난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동단국 설립 직후부터 발해인 저항이 계속되자 거란은 동단국 우차상인 아율우지 건의에 따라 동단국을 거란 내지로 옮긴다"며 "동단국은 요양(遼陽) 지역으로 천사되고, 거란은 이곳을 남경으로 승격했다가 동경으로 개칭했다"고 했다.

이어 "동경도 내에 거주한 발해인을 이주한 동단국 주민이라고 할 때 그 숫자는 대략 1만7천500호 이상이었다"며 "동단국을 옮길 때 일부 주민은 천사를 거부하고 주변의 고려와 여진으로 달아났다"고 덧붙였다.

책에는 발해 유민 저항과 부흥 운동, 요와 고려의 발해 유민 거주지, 금과 고려의 발해인 거주지 등에 관한 지도를 수록했다.

요와 금에서 발해인 역할과 성격, 발해 유민과 불교 사원에 대한 글도 실었다.

299쪽. 1만5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