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史서 소외된 여성 작곡가들의 삶
2006년 영국 공영방송 BBC가 주최한 세계적 클래식 음악 축제 ‘더 프롬스’에서 연주된 200여 곡 중 여성 작곡가의 작품은 세 곡뿐이었다. 1995년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 콘서트 시즌에 연주된 1500여 곡 가운데 고작 세 곡만이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었다.

슬로바키아 출신 이스라엘 음악학자 이디스 재크가 저서 <세이렌의 노래>에서 여성 작곡가의 작품이 세계 클래식음악 시장에서 얼마나 소외되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든 사례들이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올 들어 국내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된 작품 목록에서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클라라 슈만을 빼고는 여성 작곡가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당대 사회·문화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역사, 심지어 음악사에서조차 소외된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12세기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부터 현대음악 작곡가인 소피아 구바이둘리나(1931~)까지 개성 있는 작품들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스무 명의 여성 작곡자들을 소개한다. 이들이 창작의 영역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의 한계와 편견에 맞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전략을 세워 전문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세세하게 들여다본다.

스무 명의 여성 음악인 중에는 폰 빙엔과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오귀스타 홈즈 등 익히 알 만한 이름들도 있지만 클래식 애호가라도 처음 들어봤을 만한 인물이 적지 않다. 17세기 메디치 궁정의 초일류 음악가였던 프란체스카 카치니, 루이 14세가 총애한 신동 엘리자베스 자케, 건반악기 음악의 귀재 마리아나 마르티네스, 암보 연주의 선구자 마리아 시마노프스키 등 당대에 명성을 떨쳤지만 음악사책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뛰어난 음악인들의 삶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들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상당수 남아 있어 공연장의 연주 목록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작곡가들의 세계에 대한 입문서로서 가치를 인정할 만한 책이다. (배인혜 옮김, 만복당, 344쪽, 1만8000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