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오페랄리아 콩쿠르 2위 바리톤 김기훈 인터뷰
이종격투기 선수 꿈꾸던 소년, 세계 놀라게 한 성악가 되다
"잠깐, 잠깐만요.

제가 음을 잘못 짚었어요.

다시 하면 안 될까요?"
지난달 23일 (현지시간) 체코 프라하 국립극장. 국제 성악 콩쿠르인 '오페랄리아 2019' 세미 파이널에서 반주를 맡은 피아니스트가 벌떡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몸짓과 절박한 목소리는 페이스북 생중계로 생생하게 전달됐다.

긴장감이 팽팽한 콩쿠르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정은 이렇다.

한국인 '바리톤' 김기훈(28) 순서에서 피아니스트가 '테너' 키로 연주한 것. 김기훈은 경연 도중이라 항의하지 못한 채 노래를 그대로 불렀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피아니스트가 자진신고하며 사과했다.

주최 측은 실수를 인정하며 김기훈에게 다시 부를 기회를 줬다.

우여곡절 끝에 2위와 청중상을 차지했다.

최근 종로구 수송동에서 마주한 그는 "콩쿠르 현장에서는 별일이 다 있다"며 그때를 회고했다.

"처음 눌러준 음을 들었는데 너무 높은 거예요.

이걸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죠. 하지만 무대에 일단 올라가면 변명의 여지가 없거든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악으로 깡으로 불렀어요.

음 이탈이 나서 수치스럽고, 멘탈은 바스러지고, 제 음역을 넘어선 노래를 하느라 몸에 힘을 줘서 그런지 온몸이 아프고…. 너무 억울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관객 반응은 뜨거웠어요.

바리톤이 테너 키를 소화하니까 신기해하면서 손뼉 치고 웃더라고요.

그 덕에 청중상까지 받았나 봐요.

"
이종격투기 선수 꿈꾸던 소년, 세계 놀라게 한 성악가 되다
김기훈은 지난 6월 세계 3대 콩쿠르 가운데 하나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남자성악 2위를 기록해 국내 성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오페랄리아에서도 2위를 거머쥔 기세가 대단하다.

하지만 주변에선 '될성부른 떡잎이었다'는 반응이 많다.

전라남도 곡성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성악을 시작했다.

다른 음악가들에 견줘 늦은 출발이었지만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을 수석 졸업했고, 2016년부터 최근까지 독일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전속 가수로 무대에 섰다.

탄탄대로만 달려온 것 같은 그의 성악 인생에도 부침은 있었다.

군 복무 때였다.

김기훈은 스무살이던 2011년 광주광역시 육군 제31보병사단에 입대했다.

"대한민국 건강한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국제대회 우승자를 위한 병역 특례를 노리고 굳이 미루고 싶지 않았죠. 큰 목소리 덕에 조교로 발탁됐다가 나중에 군악대로 옮겼어요.

수자폰(대형 금관악기), 아카펠라, 사물놀이와 꽹과리까지 안 해본 게 없네요.

그런데 무리해서인지 성대결절이 생겼어요.

성악을 접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때 이종격투기에 푹 빠져있었는데, 진지하게 선수의 길로 가볼까 고민도 했어요.

"
다행히 성대결절은 차차 치유됐고, 남다른 커리어를 밟을 수 있게 됐다.

연이은 콩쿠르 입상 소식을 전해 들은 부모님 반응이 어땠냐는 물음에 그는 눈을 반짝였다.

"오페랄리아를 마치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 부모님이 KTX 곡성역에 마중 나오셨어요.

보자마자 '고맙다 사랑한다' 해주셨죠. 제가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역시 가족이에요.

아, 청년회와 이장단에서 '000의 아들 콩쿠르 2위' 플래카드도 마을 어귀에 달아주셨더라고요.

하하."
인터뷰 막바지, 김기훈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그가 수상한 오페랄리아는 세계적인 명성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1993년 창립한 대회다.

최근 AP통신은 여성 오페라 가수 8명과 무용수 1명 등 총 9명이 과거 도밍고로부터 성(性)적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고 보도했다.

김기훈은 "보도를 접하고 굉장히 놀랐다"며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그는 "콩쿠르 현장에서 도밍고와 아내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여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본 모습과 해당 보도가 판이해서 착잡했다"며 "실제 그런 행위가 있었든 아니든 어떤 형태로든 진실이 명백히 밝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김기훈은 바쁜 일정을 앞뒀다.

오는 10월부터 내년 1월까지 독일 러스톡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내년 3월부터 7월까지 영국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사랑의 묘약'에 출연한다.

2021년에는 미국 워싱턴 오페라하우스에서 '라 보엠' 공연을 한다.

그는 "한국에서 소프라노 하면 조수미 선생님을 떠올리듯, 바리톤 하면 김기훈이 생각나게 하고 싶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 정도의 발자취는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유명해지는 것보다 설득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음악뿐 아니라 행동도 사회적 이름에 걸맞아야 한다"며 "훗날 제 위치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자리가 된다면, 기꺼이 사회문제에 발언하고 참여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종격투기 선수 꿈꾸던 소년, 세계 놀라게 한 성악가 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