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양국 원로가 “서둘러 출구전략을 마련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두 나라의 기업인이 물밑에서 적극 소통해 갈등 해소의 단초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오코노기 마사오 일본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재단법인 여시재에서 진행한 대담에서 이렇게 입을 모았다. 이 전 부총리는 한국경제신문과의 별도 인터뷰에서 “양국 경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일본 경제 규모는 한국보다 훨씬 크다”며 “갈등이 장기화하면 일본 경제가 더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기업인들이 출구전략 마련할 수 있어

이헌재 前 경제부총리
이헌재 前 경제부총리
한국과 일본의 기업인들이 양국 갈등을 푸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게 두 원로의 기대다. 이 전 부총리는 “솔직히 말해 문재인 대통령이 쓸 만한 카드가 별로 없다”며 “두 나라 기업인이 물밑에서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깔끔하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 정치권에 대한 자국 경제계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한 편”이라며 “양국 기업인이 자국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유연성을 발휘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다만 이 전 부총리는 “두 나라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돼도 밑바닥의 감정적 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라며 “그걸 푸는 건 양국 정치 지도자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오코노기 교수는 “일본의 이번 조치가 계획적인 데다 쉽게 번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경제 제재가 장기화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아베 신조 총리도 그렇지만 문 대통령 역시 개성이 매우 두드러진 인물”이라며 “운동권을 지지 기반으로 두고 있는 한국 정권이 법원과 하나가 돼 있지 않나 하는 오해를 일본 일각에선 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코노기 교수는 “잘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사법 개입이 시작된 건 이명박 정권 후반부인 2011~2012년”이라며 “일본 국민이 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사법적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양국 미디어가 자국 정부 정책에 대해 솔직하게 비판하고 있는 건 새로운 현상”이라며 “갈등이 심한데도 일본에서 제3차 한류 붐이 불고 있다는 건 두 나라 관계가 중층적인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갈등 해소 역시 다층적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일본이 더 큰 손실 볼 것”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이 전 부총리는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베트남 등 세계 각국의 글로벌 공급망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며 “한국 반도체 등이 생산 차질을 빚으면 처음엔 한국에 문제가 생기겠지만 종국적으로 경제 대국인 일본이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경제가 세계와 밀착해 있는 ‘초연결사회’란 점을 일본 정부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일본이 지속적으로 대(對)한국 제재를 가하면 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오코노기 교수도 “일본 수출 규제의 기대효과가 1~2년 정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며 “처음엔 일본이 이기겠지만 점차 힘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소재나 부품을 제조할 경우 일본 해당 기업의 존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전 부총리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 ‘독립 유지’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사람을 부를 때 ‘놈’을 붙여 비하적으로 쓰는 경향이 있는데 말레이시아나 베트남 등에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다”며 “지정학적 힘의 한계와 역사적 배경에 기반해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는 국민적 정서의 표출”이라고 했다. 이어 “2000년에 걸친 관계 속에서 나타난 현상에 대해 일본이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