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 부장(48)은 요즘 업무 실수가 잦은 사원 때문에 고민이 많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관한 사내 사전 교육을 받고 난 다음부터다. 교육에서 “일을 못하는 부하 직원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는 것도 ‘갑질’이자 법에서 금지하는 ‘왕따 행위’”라고 들었다. 김 부장은 “일을 주자니 내가 괴롭고, 주지 않으려니 괴롭힘이 될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16일부터 시행된다. 그동안 법적으로는 문제 삼기 힘들었던 직장 내 ‘갑질’과 교묘한 따돌림 등을 방지하자는 차원에서다. 전에 없던 규정이 시행에 들어가는 만큼 기업들도 분주해졌다.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전 교육을 하고 가급적이면 당분간 회식을 피하도록 했다. 후배들은 법 시행을 반가워하는 반면 선배들은 급격한 변화에 적잖게 당황해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을 맞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사내 교육 분주한 기업

기업들은 그동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취지를 알리고 위반을 막기 위해 부지런히 사전 교육을 해왔다. 한 대기업은 그룹 차원의 ‘직장 내 괴롭힘 방지 태스크포스(TF)’팀에서 전사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4년 전에 이미 발족한 TF였지만 유명무실화됐다가 최근에 힘이 실렸다. 인사 담당 임원들이 참가한 것은 물론 외부 학계 전문가까지 초빙해 팀을 꾸렸다.

한 대형 백화점은 사내 직원들에게 1시간짜리 교육용 영상을 온라인으로 듣게 했다. 다음주 월요일 오전 제출할 보고서를 금요일 저녁에 지시하지 말라거나 권위적인 말투가 부하 직원들에게 갑질로 느껴지니 주의하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기업에 근무하는 권 대리는 “갑질로 유명하던 한 선배는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며 “폭풍전야처럼 다들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해 말을 아끼고 겉으로는 평소와 같은 분위기”라고 전했다.
선배들 ‘나도 모르게 괴롭힐라’

법 시행으로 가장 눈치를 보는 것은 회사를 오래 다닌 선배들이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해온 일이 ‘위법 행위’가 될 수 있어서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이모 부장(47)은 요즘 직원들과 식사할 때마다 눈치를 본다. 여름이면 보신탕을 즐겨 먹던 그는 ‘영양의 날’을 정해 직원들을 영양탕집에 데려가곤 했다. 못 먹겠다는 직원들에게는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며 억지로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메뉴 선택권을 직원들에게 완전히 넘겼다. 지난주에는 다같이 파스타집에 가서 이름도 잘 모르는 메뉴들을 시켜 먹었다. 이 부장은 “먹고 나서도 밥을 먹은 것 같지 않아 퇴근 후 집에 가서 찌개에 밥을 비벼 먹었다”며 “서글펐지만 ‘예전에는 직원들이 이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미안한 맘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대기업에 다니는 최모 차장(42)은 ‘단톡방’ 대화 패턴을 바꿨다.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들에게 ‘리프레시’ 차원에서 아침 일찍 인사를 건네던 그였다. 그러나 오전 8시반쯤 업무 카톡을 보내도 9시까지는 대화 말풍선 옆 ‘숫자’(읽지 않은 사람 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9시가 넘어서야 하나 둘 답변이 돌아왔다. 신입 사원들이 ‘9 TO 6(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를 ‘사수’하고 있는 것이다. 최 차장은 “너무 칼같이 시간을 지켜 기다렸다가 답을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잔소리를 하면 안 될 것 같다”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요즘 9시까지 채팅방을 보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정 과장(32)도 최근 사무실에서 감정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호불호가 분명한 그는 사람들에게 가감없이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다. 그는 평소 후배들이 일을 잘못 처리한 것을 발견하면 주변에 들릴 정도로 한숨을 푹 쉬거나 혀를 차는 등 눈치를 줬다. 매주 열리는 부서 회의에서도 몇몇 후배에게 사소한 문제로 다소 무안을 주기도 했다. 그는 “일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지 누군가를 괴롭힐 의도로 그래왔던 건 아니다”며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는 상처일 수 있겠다 싶어 조심하기로 했다”고 했다.

반가운 후배들…녹음기 구매도

젊은 직원들은 새 법 시행을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사원(28)은 법 시행 직전에 참석한 ‘캠핑장 회식’에서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제대로 느꼈다.

김 사원은 지난해 가을 캠핑장 회식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모 차장이 “김치찌개를 끓여 오라”고 한 것이다. 캠핑장에는 아무런 주방집기나 재료도 없었다. 김 사원은 어쩔 수 없이 마트에 가서 냄비와 찌개 재료를 사와야 했다. 올해 반 년 만에 함께한 회식에서도 모 차장은 김씨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는 등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부장이 ‘이제 그만 하라’며 그를 닦아세웠다. 김 사원은 “지난해에는 찌개를 끓여올 때까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 황당했다”며 “앞으로 뭔가 좀 바뀌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한 호텔에 근무하는 박 주임은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녹음기가 달린 소형 펜을 구매할 계획이다. 평소 언사가 거친 상사의 폭언을 녹음하기 위해서다. 그는 “일부러 올해는 휴가철이 끝나는 시기를 골라 냈는데도 폭언과 함께 바로 묵살당했다”며 “메신저를 통한 갑질은 기록에 남지만 대화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남길 것”이라고 말했다.

IT 회사에 근무하는 김 대리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소위 ‘을’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상사의 개인적인 심부름이나 무리한 야근 또는 업무 요구 등을 과감히 거절하는 것이다. 김 대리는 “가장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한 사람만 목소리를 높이면 유별나 보이지만 다같이 문화를 바꾸면 회사도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실효성에 의문을 보이는 후배들도 있다. 한 엔터테인먼트업체는 사칙 개정안에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항을 신설했다. 그런데도 저연차 직원들은 기대가 크지 않다. 김 주임은 “부서별 인원이 많지 않은 탓에 신고자를 찾기 어렵지 않다”며 “부서 이동이나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