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기업이 일궈온 韓·日 구심력, 포퓰리즘 정치가 무너뜨렸다
일본이 지난 1일 반도체 소재의 한국 수출 제재를 발표했다. 포괄 허가제를 개별 허가제로 바꾼다지만 업계에선 수출 금지에 해당할 만큼 강력한 조치라고 평가한다. 한국 기업이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한·일 간 정치 사정이 험악한 가운데 한·일 기업들이 일궈온 양국 관계의 구심력이 와해되고 있다. 그동안 양국이 충돌할 때마다 완충 역할을 했던 기업들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정치가 양국을 멀어지게 하는 원심력만 커지고 있다.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도 크다. 정치가 경제를 망치는 모양새다.

인천 연수구에 있는 티오케이첨단재료. 세계적 포토레지스트(감광액) 기업인 일본 도쿄오카공업이 2012년 설립한 자회사다.

도쿄오카는 화학 재료의 첨단을 달리는 기업으로 연매출이 1조원에 달한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에서 필수불가결한 화학 재료다. 한국에 자회사를 둔 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고객사가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외국인 투자 우수기업으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까지 받았다.

일본 전자 부품 소재기업과 화공·기계장비기업이 한국에 앞다퉈 공장을 세운 건 2010년대 이후다. 그 뒤 지난해까지 신고된 일본 기업의 투자 건수는 3564건으로 액수로는 201억4000만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절반이 제조업이고 화공업종과 전기·전자업종이 제조업의 60%를 차지한다. 한·일 관계가 얼어붙었던 지난해에도 335건의 직접 투자가 이뤄졌다. 도레이는 2011년 경북 구미에 탄소섬유 공장을 세웠고 반도체 장비기업 도쿄일렉트론은 2012년 기술센터를 설립했다. 스크린 인쇄 전문기업 스크린홀딩스도 2017년 스크린 SPE코리아를 만들었다. 웬만한 일본 부품 소재기업은 한국에 공장을 차렸고 한국 기업과 합작해 공장을 세운 기업도 부지기수다.
[뉴스의 맥] 기업이 일궈온 韓·日 구심력, 포퓰리즘 정치가 무너뜨렸다
日기업 완제품업체 찾아 한국 진출

이들 가운데는 한국 내 수요를 감안해 공장을 세운 기업도 있지만 한국의 반도체기업과 디스플레이, 자동차업체에 소재와 부품을 적시에 공급하고 보수와 수리를 하기 위해 설립된 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공급한 부품으로 한국 완제품업체는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 수출한다. 일본에선 이를 수평분업이라고 부른다. 1970~1980년대 경남 마산 수출단지 등에서 한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 진출한 일본 기업과 궤를 달리한다.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한국과 일본 기업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한국이 일본 완제품업체를 위한 부품 공급기지 역할을 하다 이제는 일본 부품 기업이 한국 업체를 위해 찾아오고 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는 경제적 측면에서 자연스레 친숙해졌다. 한·일 기업들이 협력해 일궈온 양국 관계의 ‘구심력’이었다.

무코야마 히데히코 일본종합연구소 주임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한·일 간 무역은 중간재 생산 분야를 중심으로 한 수평 무역으로 가고 있으며 공급망이 쌍방향으로 형성되는 게 특성”이라고 밝혔다. 특히 반도체를 둘러싼 부품과 장비 소재 분야에서 이런 상황이 많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 내 직접 투자가 늘고 국산화가 이뤄지면서 일본과 한국 간 교역량은 점점 줄었다. 한국 수출 전체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기준 5.0%에 불과하다. 2000년의 11.9%에서 절반가량 감소한 수치다. 수입 비중도 2000년 19.8%에서 11.5%로 줄어들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 영향력의 감소가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 같은 영향력의 감소는 일본 경제 사정과 맞물려 있다. 2000년대 들어 첨단기술의 디지털화와 생산 체계의 모듈(복합부품)화, 인력과 인재의 이동 등 국제 경쟁의 조건이 크게 바뀌었다. 일본 기업들은 특히 디지털화와 글로벌화에 취약했다. 일본 전자산업에서 혁신이 일어나지 않자 한국 전자산업은 미국 정보기술(IT)기업으로 눈을 돌렸다. 하라다 료스케 니혼게이자이신문 논설실장은 “디지털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생산성이 떨어진 게 일본 경제의 장기침체 원인”이라고 못 박았다. 한국이 인터넷 사회에서 일본보다 한걸음 앞서나갔다. 이런 결과가 고속 성장을 낳았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최근 한국을 방문해 “지난 20년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이 1.2배, 미국은 1.8배 증가할 동안 한국이 3.7배나 성장한 것은 초고속 인터넷에 대한 과감하고 시의적절한 투자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구도에서 동북아시아 협력은 또 다른 형태를 요구했다. 일본 전자산업에서 완제품업체의 역할이 줄어들고 부품 소재업체의 역할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 부품 소재업체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 등 다른 나라의 완제품업체를 찾아 나섰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4월 일본 정부에서 한국 규제를 얘기하고 수출규제 대상으로 반도체 품목이 거론될 때 일본의 괴로운 입장을 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이 기울면 일본도 기운다. 세계적인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수출 제재를 하면서 한·일 관계에 금을 그었다. 1965년 한·일 국교가 수립된 이후 50년 이상 이어온 이른바 ‘65년 체제’가 와해됐다.

韓경제력 커진 것도 갈등 심화 요인

이런 구심력의 와해를 예정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기무라 간 일본 고베대 교수는 “한국이 대일 경제의존이 심할 때는 정치에 큰 갈등이 없었지만 대일 의존도가 약해지면서 한·일 관계가 갈등구조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규제 발표는 갈등 구조의 범퍼 역할을 했던 민간 기업을 직접 타격했다. 무코야마 연구원은 “한·일 관계에서 민간 기업이 타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한국 경제에 일정한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 포퓰리즘에 의한 원심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아베 총리에 이어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9일 수출규제 협의 요청과 관련해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화이트국가에서 제외되고 공작기계와 탄소섬유 등 한국 산업에 치명적인 부품 소재의 수출규제로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글로벌 제조업 공급망 큰 타격

일본 식자층에선 이번 정부 조치에 반발하고 있다. NHK가 8일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규제 강화 찬성이 45%로 반대 37%에 8%포인트만 앞선다. 보수 우익 진영에선 80%까지 찬성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국의 수출은 세계 경제의 바로미터다.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면서도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지금 반도체 등 주요 수출품을 생산하지 못하면 세계 제조업이 중단되고 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발표가 나온 다음날 사설에서 “스마트폰 PC 등 반도체를 사용하는 모든 기기의 생산이 차질을 빚어 혼란이 세계에 확산될 수 있다”며 “일본에서 공급 충격을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필요에 의해 상호의존적이다. 정치가 이를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키게 하고 매듭지어 버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