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실존주의·페미니즘…전후 파리지앵의 유산
“전후(戰後) 10년 동안 파리의 목소리는 나폴레옹의 영광이 절정에 달했던 1815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저명한 영국 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의 말이다. 여기서 전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의 목소리는 파리 좌안(Left Bank)에 살았던 지성계와 문화예술계의 목소리다. 목소리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이름들의 무게에 숨이 가빠온다.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사뮈엘 베케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모리스 메를로 퐁티, 알베르토 자코메티, 마일스 데이비스, 브리지트 바르도, 프랑수아즈 사강, 크리스티앙 디오르….

프랑스 작가 아네스 푸아리에가 쓴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은 1940년대 파리에서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사상, 예술, 정치, 사랑의 형식을 모색하고 실천한 파리 좌안 지성계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낸다.

저자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명인과 좌안의 구성원을 소환한다. 대부분 1900~1930년 태어나 1940~1950년에 파리 좌안에서 살고, 일하고, 사랑하고, 싸우며 ‘전후 파리를 가장 독창적인 사랑·예술·사상·정치의 실험실로 탈바꿈시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 시기에 실존주의와 페미니즘, 다자 연애, 부조리극과 누보로망·앵포르멜 등 새로운 사상과 예술, 삶을 탄생시키고 확산시켰다. 저자는 이들이 누구와 교류하고 사랑하고 싸웠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시기했는지, 어떤 사적인 열망과 자기기만을 지닌 채 이상과 공통 이해를 위해 노력했는지, 어떤 세부 과정을 거쳐 각 성과의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마치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되살린다. 지금 우리의 사고·표현·생활 방식에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파리 좌안의 ‘유산’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책을 읽고 나면 《페스트》와 《제2의 성》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자코메티의 조각 ‘가리키는 남자’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가 새롭게 다가올 수 있겠다. (노시내 옮김, 마티, 496쪽, 2만5000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