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을 게 빚밖에 없다”는 이유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을 통해 이뤄진 상속포기와 상속한정승인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속을 받을 때 적극재산(재산·채권 등)뿐 아니라 소극재산(채무·유증 등)도 물려받게 되는데, 소극재산이 적극재산보다 많을 경우 상속자가 상속권을 포기하는 게 상속포기다.

한정승인은 상속받은 재산 한도 내에서만 피상속인의 빚을 갚는 것이다. 상속포기와 상속한정승인이 늘어나는 것은 ‘경기불황의 어두운 단면’이라는 분석이다.

"물려받을 건 빚뿐"…상속포기 '역대 최고'
지난해 상속포기 28% 급증

13일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총 3915건의 상속포기와 4313건의 한정승인이 일어났다. 2009년에 상속포기가 2515건, 한정승인이 2590건 발생한 것과 비교할 때 10년 동안 각각 55.7%, 66.5%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 큰 폭의 오름세를 보였다. 상속포기는 2014년 3401건에서 2017년 3048건까지 하락했다가 2018년 3915건으로 28.4% 늘었다. 한정승인도 이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며 작년 26.2% 증가해 4000건을 돌파했다.

전문가들은 ‘불황의 여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병태 KAIST 경영학과 교수는 “부모 재산이 많으면 상속을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며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으로 자영업자 등이 직격탄을 맞아 빈곤층으로 떨어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빈곤층 가구 소득은 전년보다 17.7% 줄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을 보였다. 임시직 일자리가 감소하고 자영업이 부진하면서다. 1997년 위환위기 직후에도 상속포기 등이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정승인이 증가한 것은 기업의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형 법무법인의 한 상속전문 변호사는 “주로 피상속인이 기업체를 운영해 채권·채무관계가 복잡한 나머지 상속받는 게 이득이 될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속인들이 한정승인을 신청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법원에 파산을 신청한 기업이 역대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가족 간 소통 단절로 어려움 가중

최근 가족 간 소통이 단절되면서 상속포기와 한정승인을 신청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민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한 60대 남성이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았다. 오랜 기간 연락 없이 지내던 여동생이 두 달 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동생이 배우자와 자녀가 없고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신 상황이라 본인과 나머지 형제들이 상속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장기간 왕래가 없던 여동생의 정확한 재산 내역을 알지 못해 상속포기를 해야 할지 말지 난감해했다.

상속인이 상속포기를 하는 순간 피상속인의 빚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후순위 상속인에게 자동으로 전달된다.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에게 빚이 상속돼 마지막 상속인인 4촌 이내 방계혈족까지 모두 상속포기를 해야 ‘빚의 대물림’이 해소된다. 하지만 자신의 상속포기 사실을 후순위 친척들에게 알리지 않아 그들이 빚을 덤터기 쓰는 상황도 종종 빚어진다. 상속권이 넘어온 지 3개월 이내에 상속포기를 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빚을 떠안아야 한다.

■상속한정승인

상속받는 재산 한도 내에서만 피상속인의 빚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상속을 받는 것이다. 가령 부모가 재산 1억원과 빚 3억원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자녀가 한정승인을 받으면 3억원의 채무 중 물려받은 재산 금액에 해당하는 1억원만 상환하면 된다. 피상속인이 남긴 재산과 채무가 불분명한 경우 주로 신청한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