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대사회 든든한 영웅 창조…'마블 신화'를 쓰다
마블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영화들은 모두 마블(MARVEL) 로고에 원작 만화 속 장면들을 빠르게 입혀 보여주며 시작한다. 지난달 개봉한 ‘캡틴 마블’은 달랐다. 만화 대신 한 남자 노인의 얼굴과 사진들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이어 ‘Thank You, Stan’이란 자막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지난해 11월 12일 세상을 떠난 ‘마블의 얼굴’ 스탠 리를 추모하는 영상이었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등을 탄생시킨 ‘마블 슈퍼히어로들의 아버지’ 스탠 리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평전 《더 마블 맨》(한경BP)이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개봉일인 24일에 맞춰 출간된다. 홀대받는 만화가에서 현대판 신화의 창조자로서 창작의 아이콘이 된 스탠 리는 과연 마블에 어떤 존재였을까.

불안한 현대사회 든든한 영웅 창조…'마블 신화'를 쓰다
‘현실’에 기반한 영웅 탄생

이 책을 쓴 미국 대중문화평론가 밥 배철러는 스탠 리의 90여 년 인생 여정과 예술의 실체를 ‘현실에 기반한 스토리 구축’으로 설명한다. 스탠 리는 1950년대 만화를 저급 문화로 여기던 미국 사회에서 ‘스탠리 리버’라는 본명을 ‘스탠 리’라는 필명으로 바꿔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만화가 가진 ‘상상력의 힘’을 믿었다.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스탠 리는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놨다. 슈퍼맨, 원더우먼 등으로 대변되는 선천적인 힘과 능력을 타고난 전형적 영웅이 아니라 스파이더맨처럼 현실 속에서 일반인과 같이 삶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복잡한 성격의 영웅을 창조해냈고 대중은 열광했다.

스탠 리는 무엇보다 ‘정체를 드러내는 슈퍼히어로’를 만들었다. 마블의 첫 시리즈 영화인 ‘아이언맨’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내가 아이언맨”이라고 정체를 밝히는 대목은 영웅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는 히어로들과 다른 점이다.

‘마블 세계관’의 창조자

스탠 리가 오늘날 ‘마블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마블의 히어로 만화들을 ‘마블 유니버스’라는 거대한 세계관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저자는 “스탠 리는 슈퍼히어로들과 그들이 얽힌 세상 사이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면서 ‘마블 세계’의 미래를 더 성장시켰다”며 “무엇보다 이 세계관이 캐릭터들과 독자 간 결속력을 공고히 해줄 거라 믿었다”고 설명한다.

마블 유니버스 탄생에는 스탠 리가 만화 속 배경을 실제 도시로 삼았던 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모든 만화 속 배경을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설정했다. 배트맨의 고담시나 슈퍼맨의 메트로폴리스와 같이 허구적 배경으로 한 DC코믹스와 다른 점이다. 이로 인해 장소 묘사가 더욱 정확하고 세밀해졌고 독자들은 슈퍼히어로가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탠 리는 또 실제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히어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게 설계했다. 그 안에서 ‘어벤져스’처럼 히어로들이 언제든 연합 또는 대적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시대정신과 현실을 만화에 담아

스탠 리는 항상 현실세계에서 주제를 끌어온 다음 이야기에 맞게 문맥을 연결하는 스토리를 즐겼다. 모든 이야기는 시대정신과 무관하지 않은 현실성을 담았다. 무기 제조기업을 운영하는 아이언맨은 군산복합체의 성장을 경고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쿠바 미사일 위기를 떠올리며 창조해냈다.

스파이더맨은 방사능 거미에 물려 인생이 바뀐 10대 소년이었고, 헐크는 물리학자인 주인공이 방사능을 연구하던 중 감마선에 노출돼 탄생한 히어로다. 냉전시대에 핵무기에 대한 공포가 대중을 사로잡던 시대 상황을 영웅 탄생의 중심 소재로 활용했다.

‘옆집 이웃’ 같은 히어로들을 직장 동료처럼 때론 가족처럼 지내는 멤버들 간 관계에 초점을 맞춰 그린 것도 스탠 리가 창조해낸 ‘마블 히어로’의 특징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도 슈퍼히어로들이 우리처럼 살아숨쉬는 인간이고, 갈등하고 다투지만 결국 힘을 모으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스탠 리가 생전에 카메오로 출연한 마지막 작품이다. 영화 속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그를 찾아내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또 다른 재미가 될 듯하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