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유의 밤' 행사

지난 달 31일 저녁 서울 관악구 서울대 미술관에서는 특이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주한프랑스문화원이 주최한 ‘사유의 밤’(La Nuit Des Idees) 행사입니다. 서울에서는 올해가 2회째이지만 세계적으로는 2016년부터 시작된 ‘사유의 밤’은 매해 1월 마지막 주 목요일,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 100여개 이상의 문화 기관에서 현대 사상을 논하고 사유를 공유하는 연례행사입니다. 동일한 주제에 대해 지식인, 연구원, 예술가, 작가, 기자, 국제 지도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강연, 토론, 영화상영, 예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으로 생각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2019년도의 큰 주제는 ‘현재에 직면하다’인데 주한프랑스문화원은 ‘빨리 빨리: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른가?’(Pali Pali: A Societe contemporaine Va-t-elle Trop Vite?)라는 주제로 사유의 밤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큰 주제는 파리프랑스문화원에서 정하는데 주한프랑스문화원은 그 틀 안에서 한국사회에게 어울릴만한 소주제로 ‘빨리 빨리’라는 한국만의 특성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1부 토론의 주제는 ‘우리는 어떤 속도로 살고 싶은가?’(A Quelle Vitesse Voulons-nous Vivre?)이고 2부의 주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떻게 사회적 시간을 구성할 수 있을까?’(La Gestion Collective Du Temps, Un Outil Pour Le Bien-etre Des Citoyens?)였습니다.

열거된 주제들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으신가요? 프랑스의 대학입학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eate)의 철학 시험이 떠오르게 됩니다. 4시간 동안 3개 주제 중 1개를 선택해 논문 형태로 작성해야 하는 철학시험 논제는 프랑스 지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인식되고 있어, 시험이 끝난 후 각 언론매체등에서는 유명인사와 시민들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열 정도의 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고 하죠.

500여명이 참관한 토론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프랑스인 패널이 한국 엘리베이터는 닫힘 버튼이 닳아있다고 지적할 때에는 한국인의 조급한 성격을 지적하는 것 같아 멋쩍기도 했죠. 토론 중간에는 참여형 퍼포먼스로 ’1분간 기다려주세요‘가 진행됐습니다. 각자 눈을 감은 상태에서 속셈을 하지 않고 1분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고개를 드는 퍼포먼스인데 사람마다 시간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사를 진행한 영상아티스트 사바이 라메당-레비에 따르면 사람들은 평균 96초가 지났을 때 1분이라 느끼고 나이가 많을수록 더 긴 시간을 끈다고 하더군요.

사회적 시간에 대한 토론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소도시 렌느의 카차 크루게 시장 보좌관은 ‘시간 정책’을 최초로 도입한 렌느의 사례를 소개해줬습니다. 개인이 시간 관리를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적으로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청 청소원들은 새벽이나 심야에 사무실 청소를 하느라 근무조건이 열악했는데 시가 통상적인 근무시간에 청소를 하도록 했다고 하네요. 사무실당 10분 정도면 청소가 가능하니 사무실 직원들에게는 10분의 휴식시간을 주고, 청소원들에게는 남들과 같은 통상적인 근무시간을 보장하자는 것이었죠. 덕분에 청소원들의 생산성이 15% 정도 향상되고 이직률도 낮아졌다고 하더군요. 또한 직장인 출퇴근 시간에 하나뿐인 전철 노선이 매우 복잡했는데 대학 전체 수업의 절반 정도를 15분 늦추고 나서 전철 혼잡도를 상당히 낮출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빨리 빨리’는 한국의 압축성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느긋해지며 서구인들처럼 삶의 여유를 찾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토론회를 참관하면서 프랑스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학입시로만 철학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전세계 누구라도 ‘사유의 밤’ 행사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토론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프랑스의 저력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행사 막바지 칵테일파티에서 맛 본 와인과 마카롱보다 나와 사회에 대해 한번쯤 생각을 가다듬어볼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태웅 레저스포츠산업부 기자 redae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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