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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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사죄하고 법적으로 배상하라!”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대로 남았다. 끝내 일본의 사과를 듣지 못하고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고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외침은 영상으로, 시민의 목소리로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뚜렷이 울려퍼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과도 같은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이 1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엄수됐다. 병상에 눕기 전까지 김 할머니가 수요일마다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며 집회에 참석했던 곳이다.

시민장으로 진행된 이날 영결식은 600여명의 추모객이 함께했다. 교복 입은 중학생부터 지팡이를 집은 노인까지, 수녀 스님 장애인 등 각계 각층의 시민들은 저마다 노란 나비 모양의 종이 깃발을 흔들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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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경 연세대학교의료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김 할머니는 일본이 사죄하는 날 활짝 웃으시겠다며 잘 웃지도 않으셨다”며 “이제 그곳에서 너무도 원했던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들도 꼭 낳으시고 마음껏 웃으세요”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이날 영결식에 앞서 김 할머니는 오전 6시 30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떠났다. 강추위가 다시 돌아온 이른 아침이었지만 김 할머니의 발인을 찾은 유가족과 조문객, 취재진 등 100여명은 일찍부터 빈소를 찾았다.

수요집회를 주최하며 임종까지 김 할머니를 챙겼던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고인의 운구함이 운구차에 실리기 직전 운구함 위에 “훨훨 날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길이길이 행복을 누리소서”라는 글을 남겼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영결식…사그라지지 않는 그녀의 외침
빈소를 떠난 김 할머니는 서울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으로 향했다. 평화의 우리집은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마련한 안식처다. 부산 출신인 김 할머니는 생전 8년가량 이곳에서 머물렀다. 문이 열리고 김 할머니의 영정이 들어가자 이곳에 있던 길원옥 할머니는 “왜 이렇게 빨리 가셨어. 이렇게 빨리 안 갔어도 좋은데. 나도 따라갈게요”라고 말했다.

안식처를 떠난 고인은 오전 8시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노제(路祭)가 시작됐다. 운구차 뒤로는 94개의 만장(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을 써놓은 커다란 깃발)이 도열했고, 나비깃발과 피켓을 손에 든 600여명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만장엔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영웅 김복동” 등의 글귀가 담겼다.

운구행렬은 광화문광장을 지나 사직로를 따라 일본대사관 앞까지 행진했다. 행진 내내 거리에서, 영결식 장소에서 김 할머니의 외침은 영상을 통해 또렷이 퍼졌다.
“억울하고 분통해서 죽지를 못하겠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