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14세에 위안부 연행…온갖 고초 겪고 1947년 귀향
위안부 피해자 투쟁 '기념비적 인물…다른 전쟁 피해자들 지원에도 앞장
"아베는 사죄하고 배상하라."
28일 유명을 달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3) 할머니가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서 주최 측을 통해 병상에서 외친 말이었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를 향해 진심어린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명을 다해가는 상황에서 고령을 무릅쓰고 현장에 나와 일본 정부에 끝까지 사죄를 요구하다 끝내 숨을 거뒀다.

정의기억연대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1925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만 14세인 1940년 위안부로 연행돼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 침략 경로를 따라 위안부로 끌려다녔다.

온갖 고초를 겪은 뒤 해방 이후인 1947년에야 귀향할 수 있었다.

1992년 3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하며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8월 국제사회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참혹한 전쟁 피해를 온몸으로 생생하게 겪은 당사자였던 터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른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도 적극 표시했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대지진 당시 피해자들을 돕는 모금활동에 참여했고, 2012년 3월에는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유엔인권이사회와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 각국으로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시 성폭력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2015년 5월 국경없는기자회는 김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에 선정했다.

이후에도 재일 조선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포항 지진 피해자를 돕는 일에 아낌없이 후원하는가 하면 단체들로부터 받은 상금을 외국의 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 지원활동에 기부하는 등 과거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놓은 이들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김 할머니는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늘 모습을 드러내는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투쟁에 앞장선 기념비적 인물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