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든 노동과 늘어난 풍요의 근원은 무엇일까. 법을 앞세운 강압적 제도에 더 크게 기인하는가. 아니면 경쟁과 보상 원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혁신하며 생산성을 높인 결과일까. 국가 주도의 이상적 설계보다는 개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우선되는 시장시스템에 의해 누적된 성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법이 개미를 베짱이로 만든다면…
‘저녁이 있는 삶’은 밤이 더 화려한 현대인에게, 특히 젊은 층에 달콤하게 들릴 구호다. 감성적 주장이 대개 그렇듯, ‘인간적’으로 비쳐질 만하다. 논란이 가시지 않는 근로시간 단축의 법제화(근로기준법 개정)는 이런 대중영합 정치의 소산물이다. 7월부터 시행은 되지만 여러 갈래에 걸친 문제점은 그대로다. 생산현장의 직업별 특성이 무시되는 것부터 정부가 성장잠재력을 발목 잡는다는 지적까지 한둘이 아니다.
더 큰 걱정은 ‘노후가 빈궁한 삶’을 재촉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더 일할 기회를 뺏는 것, 고용 생태계 교란 유발과는 또 다른 문제점이다. ‘워라밸’도 좋고, 휴식도 필요하다. 하지만 법을 내세운 국가의 개입과 강제가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말끝마다 ‘인민의 행복’인 공산사회의 허구까지 갈 것도 없다. 행복 추구권은 확실히 보장하되, 개인들에게서 국가를 향한 막연한 의존 심리나 ‘행복에 대한 과도한 기대치’는 오히려 빼주는 게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법이라는 ‘보이는 주먹’이 횡행하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비효율, 생산성 추락이다. 그냥 찍어낸다고 돈이 아니듯, 일하는 시간을 법으로 제한한다고 여유와 행복이 담보되기는 어렵다. 노력과 땀, 창의로 만든 상품과 서비스가 교환될 때 돈이 만들어지듯, 스스로 일할 의지가 분명한 경우 근로시간은 사적자치의 영역에 두는 게 효율적이다.
'근면 자립' 가치 퇴색이 진짜 문제
산업계의 우려를 무시한 채 일하는 시간을 억지로 줄일 게 아니라 사회 각 부문이 생산성을 향상하고 부가가치를 더 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과학자 기술자도 오후 6시면 ‘땡퇴근’하고, 밤에 불 켜진 연구 단지가 없는 사회의 미래는 어떨까. 농업적 근면이 전부인 시대는 지났지만, 작업도 연구도 집중할 시기에는 집중해야 성과가 난다. 자칫 개미까지 베짱이로 만들까 두렵다.
한국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분명 문제다. OECD 자료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은 34.3달러로, 이 통계가 있는 22개국 중 17위다. 불필요한 야근, 연장근무가 많은 것도 원인일 것이다. 연간 2069시간인 노동시간도 OECD 평균보다 많다. 하지만 이 역시 일하는 방식이나 근로의 유연성 부족 탓일 수 있다. 여기에 맞는 처방이 필요한 판에 근로시간을 덜컥 줄이고 그런 식으로 일자리까지 나누겠다면 난센스다. 생산성이 향상된 ‘결과’로 노동시간이 줄어들어야 사리에 맞다.
비이성적 규제로 근검과 땀, 자립 정신이 경시될까 걱정이다. 젊은 세대에 달콤한 저녁을 준다며 기나긴 노후의 안락을 위협하고도 현명한 어른들인가. 유약하게 청년기 중년기를 보낸 나약한 노인들은 나중에 누가 보살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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