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음주로 역류성 식도염… 선배曰 "너도 영업맨 다 됐구나"
마흔을 갓 넘긴 정 과장의 서류가방 한쪽은 약봉지로 두둑하다. 얼마 전 고혈압과 고지혈증 진단을 받은 뒤부터 약을 달고 산다. 젊은 나이에 벌써 약에 의존해야 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의사의 말에 두 손을 들었다. 정 과장은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잦은 회식이 병의 원인이라는데 내 의지로 줄일 수 있는 게 없다”며 푸념했다.

김과장 이대리들이 아프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등이 유행이라지만 대부분 직장인에겐 딴 세상 얘기다. 기한 내에 끝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야근이 불가피하고, 사내외 정보 교류와 친목 도모를 놓칠 수 없으니 술자리도 빠지기 어렵다. 일과 인간관계 등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몸과 마음의 병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술도 일인데 안 마실 수도 없고”

한 제약사의 영업사원 윤씨는 목 안쪽이 답답하고 가슴 속이 쓰린 느낌에 병원을 찾았다가 역류성 식도염 진단을 받았다. 직업병이었다. 영업 업무의 특성상 저녁 술자리가 많고,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달래는 일이 잦았다. 일과 중 이동할 일이 많아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하다가 늦은 밤 폭식하는 일도 허다했다. 역류성 식도염 진단을 받았다고 부서 선배들에게 말하자 “너도 영업맨 다 됐구나”라는 서글픈 칭찬을 들었다.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고 술을 줄여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윤씨는 한숨을 쉬었다. 일하면서 이를 지키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하는 흡연은 줄이려고 하는데 업무상의 술자리는 어쩔 수가 없다”며 “그냥 견디며 살아가야지 별수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이 대리는 최근 원인 모를 허리 통증에 시달리다 병원에 갔다가 황당한 진단을 받았다. 뱃살이 과도하게 늘어나 척추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래처와의 술자리가 많아지면서 음주량과 체중이 덩달아 늘어난 게 허리에 직격타였다. 이 대리는 “입사 후 몸무게가 15㎏ 늘었는데 대부분이 뱃살이라 몸매가 배만 불룩한 외계인 이티(E.T.) 같다”며 “허리 건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을 빼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고 했다.

터널증후군·치질… 사무직의 고충

하루 중 8시간 이상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사무직 직장인들은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리서치회사에 다니는 최 대리는 손가락이 저리고 손목이 시큰거리는 손목터널증후군을 겪고 있다. 통화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어 귓가에 가져갈 때도 손이 덜덜 떨릴 정도다. 그는 “오랜 시간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어서 생긴 문제 같다”며 “각도를 비스듬히 세워 손목을 비틀지 않고도 쓸 수 있는 버티컬 마우스를 장만하고 스트레칭을 자주 하려고 노력하지만 큰 차도는 없다”고 했다.

아픔을 호소하기도 모호한 ‘말 못 할 고통’도 있다. 사무직의 고질병, 치질이다. 한 공기업에 다니는 정 과장은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길고 고기와 술을 즐기는 습관 탓에 치질을 얻었다. 증상을 무시하고 1년 넘게 살았지만 튀어나온 살점이 점점 커지고 쓰라림이 심해져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어떻게 지금까지 참고 살았냐”며 수술을 권했다.

수술받는 두려움보다 큰 건 회사에 어떤 핑계를 대고 휴가를 낼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치질 수술을 받는다고 말하자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정 과장은 결국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는다고 거짓말하고 휴가를 썼다. 며칠간 입원이 필요한 데다 업무 복귀 후 당분간은 앉아 있기 어렵다는 점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핑곗거리였다. “복직한 뒤 한동안 가운데가 뚫린 도넛 방석을 깔고 앉았어요. 일명 ‘치질 방석’인데 허리가 안 좋은 사람들도 이 방석을 애용하거든요. 여러모로 적절한 위장 전략이었죠.”

탈모·가려움… 스트레스를 어쩌리

탈모는 더 이상 40~50대 부장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한 법무법인에 다니는 30대 변호사 김씨는 최근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깎았다. 직장생활 4년간 수시로 새벽까지 이어진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에 급속도로 진행된 탈모 때문이다. 한때는 탈모 방지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아내와 임신 준비를 하면서는 약도 끊었기에 머리를 짧게 자르는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나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같은 거부들도 탈모는 못 피했다”며 “그나마 두상이 짧은 머리에 어울리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조직 내 인간관계에서 일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겪는 직장인도 상당하다. 유명 제조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강 대리는 얼굴과 팔 등의 피부가 심하게 가려워 병원을 찾았다가 피부묘기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강 대리는 바로 위 과장 두 명이 정치싸움을 하면서 중간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생활을 3년째 하고 있다. A과장 지시로 무슨 일을 하면 B과장이 “A과장 라인이냐”며 괴롭히고, B과장 말을 들으면 A과장이 괴롭히는 일의 반복이다. 밤이 되면 가려움이 더 심해져 최근엔 불면증까지 생겼다. 의사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증상은 계속 악화됐다. 강 대리는 “이 약, 저 약을 먹어가며 견디고 있지만 퇴사밖에는 답이 없는 것 같아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

과로와 스트레스 등으로 몸이 축나는 경험을 했거나 동료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직장인들은 건강 지키기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진 안마기는 요즘 젊은 직장인들이 갖고 싶어 하는 ‘위시 리스트’ 1순위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 과장은 얼마 전 200만원짜리 전신 안마의자를 24개월 할부로 구매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감’에 홀딱 빠져서다. 조 대리는 최근 발 마사지기, 목에 거는 형태의 목·어깨 마사지기, 손바닥 지압봉 등을 장만했다. 마음 같아서는 안마의자를 사고 싶었지만 자취하는 집이 작아 들여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 부위별 마사지 기기들을 샀다. “마사지받고 난 뒤엔 몸이 개운하고 잠이 잘 와요. 50대가 되면 안마기기만 50개 갖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

콘텐츠기업에 다니는 신 과장은 올해 초부터 심신안정에 좋다는 영양제 세 종류를 챙겨 먹는다. 옆자리 박 과장이 업무 스트레스로 속앓이를 하다가 갑작스레 안면마비 증상을 겪는 걸 본 게 계기였다. 박 과장은 지난해 말 연간 결산 프로젝트 이후 약 2주간 한쪽 얼굴을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넉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얼굴 근육이 떨리거나 뻣뻣해져 병원에 다녀온다. 신 과장은 “박 과장이 평소 힘든 티를 내는 편이 아니라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결국 안면 신경마비로 나타나더라”며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건강식품 해외직구 사이트에서 스트레스와 불안감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약을 여러 종류 사놨다”고 말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