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쉿! 회사 뒷담화 공간… 익명게시판 명과 암
상장기업 A사는 얼마 전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폭로성 게시글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회사 직원들끼리 익명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 ‘블라인드’에 ‘경영진이 회사의 유상증자 정보를 입수하고 주식을 사전에 팔아치웠다’는 글이 올라온 것이다. 경영진을 향한 사내 비난 여론이 확산되자 회사는 즉각 조사해 ‘전원 혐의없음’ 결론을 냈다.

블라인드로 대표되는 익명게시판이 조직 내부의 민감한 이슈를 ‘폭로’하고 ‘쟁점화’하는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현대판 신문고’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A사의 사례처럼 익명게시판에 공유되는 글이 확인되지 않은 불확실한 정보인 것도 많다. 익명게시판이 조직 화합을 깨뜨리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하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폭로사회’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은 익명게시판을 둘러싼 김과장 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폭로 창구 된 블라인드

한 수입차 판매업체는 최근 한 직원의 익명게시판 제보로 뒤숭숭하다. 회사가 조직적으로 목표를 초과 달성한 전시장 실적을 목표량에 미달한 다른 전시장으로 넘기는 ‘성과조작’을 통해 본사에서 보너스를 추가로 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회사가 배를 불리는 동안 실적을 빼앗긴 영업사원들은 판매지원금이 깎였다는 내용도 덧붙었다. 이 회사에 근무하는 박 과장은 “철저한 진상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을 아꼈다.

이 같은 익명게시판의 폭로성 제보는 사내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대기업 계열사 사장은 회식 도중 청양고추를 집어들고 “제가 ‘고추’ 하면 ‘원샷’을 외치며 먹어달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전파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한 항공사 회장의 성희롱 제보도 100건이 넘게 올라와 기사화되기도 했다.

음해성 비난 부작용

현대판 신문고로 불리는 익명게시판에는 순기능뿐만 아니라 역기능도 적지 않다. 정제되지 않은 음해성 정보가 사실처럼 퍼지면서 피해를 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콘텐츠 회사에 근무하는 김 대리는 자신을 비난하는 동료들의 블라인드 게시물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예정인 연예인들과 저녁식사를 한 뒤 인스타그램에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린 게 화근이었다. 이를 본 다른 직원이 “우리는 서류 더미에서 야근하고 있는데 어떤 팀은 매일 노는 게 일”이라고 힐난한 것이다. 그러자 또 다른 직원들은 “난 원래 저 친구 인상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인신공격형 댓글을 달았다. 김 대리는 “이 일로 우울증이 심해져 퇴사까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기업 인사·감사팀 직원들에겐 인사 때마다 익명게시판에 등장하는 유언비어가 골칫거리다. 지난해까지 대기업 인사팀에 근무했던 이 과장은 부서를 옮기며 상사에게 “제발 감사업무만은 피하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경험상 익명 고발된 사건의 절반 이상이 허위거나 음해성 제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과장은 “과거 인사철에 ‘매일 여직원 몸을 보며 시선 강간 일삼는 A팀장’이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며 “감사 결과 근거없는 이야기로 밝혀졌지만 평판 좋기로 유명하던 A팀장의 사내 이미지는 회복할 수 없이 추락했다”고 설명했다.

채용사이트에 음해성 글이 올라와 진땀을 빼는 기업도 있다. 한 중견 섬유업체는 “이 회사에 입사했다가 대인기피증에 걸렸다”는 글이 한 달 전 채용사이트에 게재되면서 경력직 채용에 애를 먹고 있다. 이 글이 올라온 뒤 최종면접을 앞둔 네 명의 지원자가 연달아 불참을 통보했다. 이 회사 인사팀 성 팀장은 “작성자가 글 속에서 자신을 ‘재경팀’ ‘과장급’ ‘여자’ ‘퇴사자’라고 특정했는데 그런 사람은 회사에 없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관리’ 또는 ‘금지’ 나서기도

익명게시판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사내 여론 형성과 불만 제기의 주요 통로로 활용되면서 이들 사이트를 모니터링하고 관리하려는 회사도 늘어나고 있다. 블라인드에 올라온 내용을 자발적으로 경영진에 보고해 점수를 따는 ‘프락치’도 등장했다. 문제가 된 게시글의 내용과 문체를 분석해 글쓴이 색출에 나서는 회사도 있다.

국내 한 중소병원 노무팀에 근무하는 최 과장은 가욋일이 늘었다. 그는 요즘 각종 익명사이트와 직원들이 주로 활용하는 SNS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초과근무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글이 한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뒤 노무팀장이 온라인상에 올라오는 직원 글을 빼놓지 말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 소통의 창구로 써야 할 SNS마저 일터로 바뀌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블라인드 금지령을 내린 회사도 있다. 한 금융회사 팀장은 최근 팀원들을 모아놓고 “블라인드를 꼭 계속해야겠다는 사람만 손들라”며 사실상 ‘일괄 탈퇴’를 종용했다. 블라인드에서 대표이사를 겨냥해 “돈밖에 모르는 사람” “조직보다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다” 등의 비난글이 쇄도하자 블라인드 전면 차단에 나선 것이다. 이 회사 심 과장은 “이런 일이 있은 뒤 회사 블라인드는 더 이상 폭로글이 올라오지 않는 ‘유령 게시판’이 됐다”며 “누가 그런 글을 올렸는지 찾아낼 시간에 회사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이직자에겐 정보의 바다

이직을 꿈꾸는 직원들 사이에서 블라인드는 ‘정보의 바다’로 불린다. 공기업에서 일하면서 남몰래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최 대리는 눈만 뜨면 블라인드부터 확인한다. 대형 항공사 기장 등 현직들이 올린 글을 보면서 각 회사의 자세한 근무 여건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다. 궁금한 점은 직접 질문하기도 한다. 최 대리는 “현직들의 진솔하고 영양가 높은 댓글이 조종사 준비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때문에 부부관계가 틀어진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제조업체 C사에 다니는 박 대리는 결혼 후 줄곧 아내에게 감추고 있던 비정기 상여금의 존재가 블라인드를 통해 발각됐다. 동종업계 다른 회사에 근무하는 아내가 블라인드 ‘직군별 라운지’에서 상여금을 둘러싼 직장인의 갑론을박을 읽다가 C사가 상여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는 “결혼 생활 5년 동안 혼자 간직해온 비밀 하나가 블라인드 때문에 탄로 나버렸다”며 멋쩍어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