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릴리, MSD 등 다국적제약사들은 최근 몇 년 새 알츠하이머를 일으킨다고 알려진 단백질 ‘베타 아밀로이드’를 겨냥해 개발하던 치료제의 임상시험을 중단했다. 같은 타깃으로 치료제를 개발해 오던 세계 최대 제약사 화이자는 지난 6일 앞으로 더 이상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개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존의 가설과는 다른 접근법으로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개발하는 업체들이 주목받고 있다.
베타 아밀로이드 가설은 실패?
치매의 여러 종류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알츠하이머는 베타 아밀로이드와 연관이 깊다고 알려져 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서 베타 아밀로이드가 뭉쳐진 덩어리 형태로 축적돼 발견되기 때문이다. 의학계에서는 이 덩어리들이 독성 물질을 배출하고 염증을 일으켜 신경세포를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알츠하이머를 유발한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제약사들이 베타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방식의 치료제들을 개발해 왔다.
하지만 다국적 제약사들이 잇따라 임상시험에 실패하면서 베타 아밀로이드 덩어리를 없애더라도 알츠하이머 증상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화이자가 2012년 존슨앤드존슨과 공동으로 개발하다 임상 3상에서 포기한 ‘바피뉴주맙’, 2016년 일라이 릴리가 실패한 ‘솔라네주맙’, 지난해 초 MSD가 개발을 중단한 ‘베루베세스타트’가 대표적이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베타 아밀로이드는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 20여년 전부터 쌓이기 시작한다”며 “이미 만들어진 베타 아밀로이드는 다른 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해 신경세포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더라도 근본적인 치료로는 이어지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치매 예방백신 개발까지 본격화
실패가 계속되고는 있지만 업계에서는 베타 아밀로이드 가설이 틀렸다고 단정짓는 게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다. 국내외 많은 제약사들은 베타 아밀로이드를 타깃으로 하는 연구개발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대신 최근에는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또다른 원인으로 알려진 타우 단백질을 동시에 공략하는 등 다른 기전과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국내 업체 젬백스엔카엘은 타우 단백질과 베타 아밀로이드를 동시에 겨냥한 치료제의 임상 2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치료제의 대상 환자를 알츠하이머 초기 혹은 경도 인지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로 좁히는 등의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노바티스는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알츠하이머를 예방하는 ‘알츠하이머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2016년 임상 3상 시험에 돌입해 기대를 모으고 있는 바이오젠의 ‘아두카누맙’은 초기의 경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재홍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제약사들이 임상시험에서 실패했던 치료제들을 보면 어느 정도 진행된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 대부분”이라며 “베타 아밀로이드만큼 지금까지 밝혀진 발병 원인 중 근거가 뚜렷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방식은 달라져도 이를 타깃으로 하는 연구개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빌 게이츠도 투자했다
업계에서는 새로운 접근법의 치료제 개발 업체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최근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점을 둔 벤처기업 ‘알렉터’다. 알렉터는 면역세포인 마이크로글리아를 활용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마이크로글리아가 뇌 세포 주변을 청소하는 과정에서 유독 물질이 분비되기도 하는데 이를 최소화하고 면역 기능만 강화하는 방식이다. 지난달 미국 제약사 애브비가 2억2500만달러(약 2400억원)를 투자했고 빌게이츠가 최근 사재를 출연한 것으로 알려진 ‘치매 발견 기금(DDF)’도 2016년 투자했다. DDF는 알렉터 외에도 베타 아밀로이드와는 다른 타깃을 겨냥해 치료제를 개발하는 업체들 11곳에 투자했다.
한번 손상된 신경세포는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신경세포를 불어넣는 줄기세포 연구도 활발하다. 국내 대표적인 줄기세포 치료제 기업들인 메디포스트와 차바이오텍은 각각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화이자 등 다국적 제약사들의 잇딴 좌절에도 불구하고 치매 정복을 향한 노력은 계속될 전망이다. 근본적인 치료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만 알츠하이머의 진행을 늦추는 약만으로도 30억달러(약 3조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될 만큼 수요가 큰 시장이어서다. 전 세계 치매 환자는 2030년 7500만명, 관련 비용은 2조달러(약 200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임락근/한민수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