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전체주의 악몽 끝나지 않았다"
“전체주의는 무한히 많고 다양한 인간을 마치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조직한다. 인간의 세계를 구성하는 다원성은 사라지고 획일성만이 존재한다. (중략) 대중이 똑같은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동일하게 행동할 때 그들은 전체주의의 폭민(mob)이 된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선과 악은 너무나 기묘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중략) 전체주의 운동의 허구 세계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파멸을 향해 질주했을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해나 아렌트(1906~1975)가 20세기 인류 역사의 어두운 부분인 파시즘과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가 어떤 경로로 태동했는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독일 태생 유대인인 저자는 1933년 나치 정권의 박해가 극에 달하자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 줄곧 전체주의를 연구한 정치사상가다.

전체주의, 맹목적 대중에 의해 태동

[다시 읽는 명저] "전체주의 악몽 끝나지 않았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전체주의라는 괴물 정치체제는 독재자가 아니라 생각 없는 대중의 필요에 의해 태동하고 만들어진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과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이 지도자의 구원을 기대했고, 이런 바람이 시대적·사회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전체주의가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아렌트의 이 같은 분석은 세계가 끔찍한 나치즘과 군국주의 등을 경험한 직후여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에 의한 단순 압제와 구별해 분석했다. 일반적인 독재정권은 반대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권력 유지에 필요한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것에 만족하지만, 전체주의는 한발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원자화된 대중을 세력화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에 닥친 경제난이 나치즘 태동의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때마침 히틀러가 등장해 퇴역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실직자에게 게르만 민족주의라는 새 방향을 제시하자, 모래처럼 고립된 군상이었던 실직자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폭민’으로 바뀌었다는 지적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폭민은 인간 본래의 개성을 상실한, 마치 복제인간과도 같이 정형화된 인간 유형이다. 그는 “전체주의의 목표는 사적 영역조차 없이 완전히 지배당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유형, 대중의 창조에 있다”고 지적했다. 옛 소련의 스탈린이 연좌제라는 장치를 통해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원자화된 대중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국가의 모범적인 시민은 이념이라는 끈으로 묶인,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와 비슷하며 그들은 행위 대신 반응을 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체주의의 원동력인 폭민을 지배하기 위해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히틀러의 반(反)유대주의나 스탈린의 계급투쟁 같은 허구적 이념뿐”이라고 설명했다. 거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허구 이념은 대중을 ‘철의 끈’으로 묶어 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필연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증오 부추기는 정치이념은 위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으로도 유명하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가 결코 피에 굶주린 악마도 아니었고 이념에 미친 광신자도 아닌 너무나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악은 특별한 것이나 심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함이 유대인 학살을 이끈 악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인간다운 방식으로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 전체주의는 강한 유혹의 형태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아렌트는 책에서 전체주의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줄곧 강조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전체주의는 재연될 수 있고, 누구나 아이히만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좌파는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내가 좌파라고 합니다.” 아렌트가 직접 밝혔듯이 그는 좌·우파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전체주의의 기원》은 좌·우 모두에서 권장도서로 추천받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 시각이 아니라 편향적인 관점에서 책을 해석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중이 필요하고, 그래야 전체주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쪽으로의 쏠림 현상이 강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많은 책이다.

김수언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