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집권 기간(1965~1986년)에 필리핀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때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살던 필리핀은 ‘아시아의 병자’ 국가로 전락했다. 하지만 최근 필리핀은 중국 못지않은 고속 성장으로 동남아시아 경제의 모범생이 됐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필리핀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6.9%였다. 베트남(6.2%) 인도네시아(5.0%) 말레이시아(4.2%) 태국(3.2%) 등 동남아 주요 경쟁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5월 발표한 ‘2017년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필리핀에 대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국가”라고 평가했다. IMF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6.8%, 내년 전망치는 6.9%로 제시하면서 “2년간 필리핀이 동남아시아 경제를 주도할 것”으로 전망했다.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가 끝난 이후에도 경제성장률이 5%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직후인 2009년에는 1.1%로 추락하기도 했다. 2010년 취임한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의 과감한 경제개혁 정책이 필리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과감한 규제 완화를 통한 외국인 투자 유치와 인프라 투자 확대 정책을 집권 6년간 꾸준하게 시행했다. 그 덕분에 필리핀 경제는 2012년 이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6%대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작년 6월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1년여간 각종 돌출 언행으로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범죄와의 전쟁’ 과정에선 국제사회로부터 인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경제정책에서만큼은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그는 “나는 경제에 문외한”이라며 “범죄와의 전쟁에만 힘쓰고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겠다”고 선언, 세간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두테르테는 1년여간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와 인프라 투자 확대정책을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필리핀 정부는 올해 예산안을 짤 때 인프라 지출 예산을 작년 대비 13.8% 늘린 8607억페소로 책정했다. 필리핀 국내총생산(GDP) 대비 5.4%에 달하는 규모다. 필리핀 정부는 이 비중을 2022년 7.4%까지 높일 계획이다. 필리핀 경제의 펀더멘털도 비교적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 이후 지속된 경상수지 흑자로 외환보유액이 꾸준히 늘고 있으며, GDP 대비 외채 비율도 최근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필리핀 경제는 그러나 적잖은 구조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과거 1차산업 위주로 경제발전 전략을 추구한 여파로 다른 아세안 국가에 비해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필리핀의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1980년 26%이던 것이 갈수록 낮아져 2015년에는 20%까지 떨어졌다. 수출이 일본(21.7%) 중국(19.3%) 미국(16.0%) 등 일부 국가에 편중(2016년 기준)돼 있고, 해외 근로자 송금액 의존도가 GDP 대비 8.8%(2016년 기준)로 지나치게 높다는 것도 필리핀 경제의 불안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