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5일까지 서울 다동 CKL스테이지에서 공연하는 연극 ‘초인종’.
다음달 5일까지 서울 다동 CKL스테이지에서 공연하는 연극 ‘초인종’.
대사와 무대에 은유와 상징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 잘 벼린 칼날들이 번뜩였다. 칼날은 극 중 인물을 할퀸 흔적을 하나씩 드러내더니 극의 주제를 향해 내리꽂혔다.

극단 907이 서울 다동 CKL스테이지에서 공연 중인 연극 ‘초인종’은 문학성이 뛰어난 무대언어의 힘을 보여준다.

연극은 해외에서 작가 생활을 하던 ‘수아’가 9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치매기가 있는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아버지가 어항에 두고 키우는 물고기가 그를 맞는다. 어딘가 어색하고 위태로운 가족이다. 수아는 아버지와 눈을 맞추는 것조차 불편하다. 아버지는 뭔가가 고장나는 것에 과도하게 민감하고 “세상에 못 고치는 게 어디 있어”란 말을 달고 산다.

수아가 9년이나 가족을 떠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수아와 가족의 사연이 드러난다. 수아가 무슨 책을 읽는지와 책상 의자를 어떤 방향으로 놓는지까지 통제하던 권위적인 아버지의 억압, 수아가 문단의 권위자에게 당한 성폭력 등이 그 중심에 있다.

극이 부조리를 그릴 때마다 김광규의 시 ‘안개의 나라’가 한 토막씩 나와 극과 어우러진다.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처럼 ‘초인종’ 소리로 ‘들어야 할 것’을 은유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가해자는 물론 수아네 가족조차 초인종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아버지는 “내가다고쳐놓겠다”며밤중에혼자집을나선다. 아버지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고장난 것을 고쳐놓는다.

극 말미 연출은 작품의 백미다. 배우들은 관객에게 마이크를 주고 극에 참여시키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풀고 우악적인 유쾌함을 만들어내더니 마침내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악의 피해자였던 수아네 가족이 결국엔 악이 돼 버리는 모양새를 강렬한 무대 연출로 폭발시킨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설유진 907 대표는 “안개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다 안개가 돼버리고 만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안개’ ‘고장’과 ‘고침’ ‘초인종’ ‘물고기’ 등의 상징적 소재를 엮은 짜임새가 튼튼하다.

또한 ‘물고기’ ‘생각’ 등을 의인화하고, 사각의 무대를 삼각으로 틀어 불안정의 정서를 조성한 점 등은 연극성을 빛낸다. 배우 황선화와 황순미가 각각 ‘수아’와 ‘생각’을, 김광덕과 박지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맡고 무용수 하영미가 ‘물고기’를 연기한다. 다음달 5일까지, 3만원.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