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우리가 꿈꾸는 선진국형 천국
누구나 공짜를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 주고 사지 않은 것은 그 가격이 얼마나 한다고 한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기 일쑤다. 우리는 돈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그가 뭔가 나를 위해 베풀 거라는 기대를 하기 쉽다.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갑질’이라니, 그 갑질을 응징하는 힘 있는 보통 사람 일세대가 출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요즘 세상은 돈이 많거나 유명한 사람들이 살기 불편한 세상이다. 그들도 한 두어 세대 올라가면 그저 배고팠던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조상이 있을 것이다. 하긴 이런 게 다 자본주의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득한 옛날이 돼버린 1980년대 말, 뉴욕에 처음 갔을 때 내게 가장 낯익은 부호의 이름은 카네기와 록펠러였다. 카네기홀과 록펠러센터가 그들의 이름을 늘 생각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겨울이면 록펠러센터 아이스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풍경 또한 잊을 수 없는 뉴욕의 추억 중 하나다. ‘부는 신으로부터 맡겨진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카네기재단을 설립하고 수많은 교육 문화시설을 세운 미국의 철강왕이며 자선사업가로 이름을 남긴 앤드루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12세에 이민 온 가난한 이민자 출신이었다.

물론 요즘 세상은 그런 기적을 꿈꾸기 힘든 세상이다. 약자들을 딛고 크게 일어난 강자의 신화도 현실은 어떻건 간에 시대착오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거액의 기부금으로 교육 의학 과학 문화 예술 분야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는 록펠러재단을 설립한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를 향해 생전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지 간에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록펠러가 뉴욕시민을 위해 만든 시설 덕에 자기 집 없이 월세를 내고 사는 사람들은 수도료를 내지 않아도 질 좋은 수돗물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 나 역시 질 좋은 공짜 수돗물을 10여 년 먹은 사람 중 하나다.

어쩌면 선진국형 천국이란 갑은 갑답게 어른의 구실을 하고, 을은 을대로 고맙게 생각하며 누리는 세상일지 모른다. 과연 그런 세상은 가능할까? 마치 세상에 전쟁이 사라지는 걸 기도하는 것과도 같은 염원은 아닐까?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나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 같은 새로운 개념의 젊은 부호들이 나타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아름답다. 우리에게 각인된 갑들의 나쁜 이미지도 다 그렇게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구경만 해도 좋은 대형 서점들과 거대한 복합 쇼핑몰 한가운데 떡하니 새로 생긴 멋진 도서관도 다 서민을 위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일상에 지친 서민이 물건을 굳이 사지 않아도 도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한 거대한 쇼핑 복합 시설들도 어찌 보면 참 고마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 로봇의 출현으로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컴퓨터 코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하게 되는 믿을 수 없는 미래에 관해 얘기한다. 나의 꿈은 그런 세상에 살아남아 인공지능이 못 따라오는 나만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이 정말 온다면 인간은 저마다의 가치 실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며, 그런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저 미래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가슴 뛰면서도 섬뜩하다.

황주리 < 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