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부관(釜關)연락선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은 부산(釜山)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국제 여객선이다. 두 항구의 앞뒤 한자 이름을 따 붙였다. 구한말 개설돼 광복 직전까지는 일본식 표기에 따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라고 불렀다.

첫 운항 날짜는 1905년 9월11일. 그날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1680t급 이키마루(壹岐丸)호가 부산에 도착했다. 정원 317명에 요금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5엔이었다. 총 운항 시간은 11시간30분이었다.

이로써 그해 1월 개통된 경부선 철도와 연계한 도쿄~규슈~부산~서울(경성) 여정이 60시간으로 단축됐다. 이 노선은 곧 의주를 거쳐 만주까지 연결됐다. 일본이 여객선 대신 연락선으로 명명한 것은 단순한 배편이 아니라 양국 철도역을 이어주는 연결 노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 입출항도 열차 시간과 맞췄다.

첫해 3만9956명이던 승객은 점차 늘어 1910년대 말에는 연간 40만 명에 육박했다. 1930년대 만주·몽골행 여객과 화물이 급증해 7000t급 여객선 공고마루(金剛丸) 고안마루(興安丸)가 투입된 뒤로는 연 100만 명을 돌파했다. 조선인의 징병과 징용이 시작된 1940년대엔 연 200만 명이 넘었다. 이렇게 1945년까지 40년간 3000만 명이 이 노선을 왕래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은 주로 유학생, 노동자, 장사꾼 등이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사람은 일제의 조선 이주 정책으로 옮겨오는 농민이 많았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싼값으로 토지를 사들여 자영농이 됐다.

격동의 역사를 관통하는 뱃길이었기에 저마다 사연도 많았다. 1926년 8월4일 새벽에는 ‘사(死)의 찬미’로 유명한 가수 윤심덕이 29살 동갑내기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뱃전에서 몸을 던졌다. 미혼의 신여성과 유부남의 비련으로 당시 조선 사회가 떠들썩했다. 이어진 영화 ‘사의 찬미’로 또 한 번 얘깃거리가 쏟아졌다. 염상섭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탔던 배도 이 연락선이다. 조용필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역시 이 배를 소재로 했다.

광복 후 단절됐던 항로는 1964년 재개됐고 1970년부터는 부관 페리호로 이름을 바꾼 여객선이 다니고 있다. 한국 국적 성희호(1만6665t)와 일본 국적 하마유호(1만6187t)가 하루 1회씩 운항한다.

그 옛날 식민 치하의 설움 대신 요즘은 관광객의 웃음과 보따리 무역상의 꿈이 갑판에 펄럭인다. 쾌속선으로 2시간30분 만에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코스도 생겼다. 규슈 올레와 온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112년 전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처럼 뱃고동 소리만 속없이 길게 울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