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처럼 '경제동물'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
종교적 편견 버리고 그들의 삶 들여다봐야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
반면 중동 고객들의 한국 선호는 놀라운 수준이다. ‘KOREA’ 브랜드가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중동 대부분의 국가가 한국을 발전의 성공 모델로 닮고 싶어한다. 우리 에너지 소비의 대부분을 이슬람 세계에 의존하고, 지난 40여 년간 해외에서 수주한 대형 건설·플랜트 공사의 약 70%를 중동지역이 차지한다. 2006년 이집트의 ‘겨울연가’ 열풍과 2007년 이란의 ‘대장금’ 신드롬으로 시작된 한류는 드라마 시청률 90%대를 기록하며 10년 이상 순항 중이다. 심지어 한국의 유일한 미수교국이자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는 시리아에서도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의 약 70%가 국산차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지독한 한국 짝사랑이다.
그런데 최근 중동을 다녀보면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의 언론인, 고위관료, 교수 등 식자층에서는 “한국이 해도 너무 한다”는 불평을 공공연히 털어놓는다.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중동을 바라보고 도무지 그들의 독특한 문화와 1000년 이상 서구와 대립했던 갈등의 역사, 특히 그들의 절대적 존재가치인 이슬람에 관한 한 고객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30여 년 전 그렇게 좋아했던 일본이 ‘경제동물’로 전락해 실망한 전철을 한국은 제발 밟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조언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모든 이슬람 세계는 예외 없이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벌을 전후로 200년 가까이 서구의 지배나 간섭을 경험했다. 711년 스페인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732년 프랑스 파리 교외까지 진출하며 유럽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슬람 세력은 1683년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부인 빈을 세 차례 공격하면서 유럽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레판토 해전을 비롯해 지중해에서 부분적인 승리는 있었지만 711년부터 1683년까지 1000년 가까이 유럽은 사실상 이슬람 세계를 이기지 못했다. 한번 상상해보자. 서슬 퍼런 중세 기독교 유럽사회가 이교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1000년 가까이 지배당하고 전쟁의 공포에 떨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런 역사적 모멸감이 오늘날 유럽사회가 이슬람 세계에 갖고 있는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의 역사적 배경이다. 이는 교육을 통해 개선되거나 치유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이자 각인된 편견의 원천이다. 그러다가 선험적 종교적 우월감에 빠져 기술발전과 물질자본의 혁신 기회를 놓친 이슬람 세계는 1, 2차 양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탈식민시대를 맞으면서 개별 국민국가로 쪼개져 독립했다. 1000년간 이슬람의 지배와 역사적 모욕을 경험한 서구가 다시 이슬람 세계를 거꾸로 지배했을 때 그들이 국제법에 따라 인도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기간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자행된 고문, 학살, 인종청소, 민족, 언어 말살 정책은 표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번도 그 지역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지구촌 4분의 1에 해당하는 최대 단일 문화권 고객이나 시장에 대해서도 철저히 가해자, 지배자, 식민국가들이 제공한 정보와 자료, 관점으로만 배우고 이해해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역사는 선악이나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지역 구성원이 온몸으로 살아간 절절한 삶의 궤적의 총량이고 생생한 기억의 총체다. 이제는 그들이 살아온 궤적과 삶의 무게를 들여다볼 차례다. 이것이 중동·이슬람권에 대한 역사와 인문학적 공부가 꼭 필요한 이유다.
중동 진출 45년을 맞는 올해, 제2중동 붐을 성공적으로 견인하기 위해 새로운 고객 관리전략과 열린 인식의 틀이 갖춰지기를 고대한다.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