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기업 존립 위기' 인정 안해

법원이 기아자동차 노사 간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준 배경에는 추가 지급될 임금이 회사 경영에 중대한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준이 아니라는 판단이 근거가 됐다.

법원은 이 같은 판단을 바탕으로 추가임금 청구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어긋난다는 기아차의 주장을 배척했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41부(권혁중 부장판사)는 노동자 2만7천여명이 기아차를 상대로 낸 2건의 임금 청구 소송에서 크게 두 단계 판단을 거쳤다.

재판부는 먼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봤다.

이는 '소정 근로 대가로 근로자에게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금품'을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례에 근거한 것이다.

즉 미리 정해진 일정한 기간마다 지급되는 임금, 일정한 조건·기준을 충족하는 모든 근로자에게 일률적으로 지급되는 임금, 초과 근로를 제공하기 전에 이미 지급이 확정된 임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

다음 판단 대상은 기아차가 내세운 '신의칙' 주장이었다.

신의칙이란 '법률관계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민법의 대원칙이자 개인 간의 법률관계를 규율하는 근대 사법(私法)의 대원칙이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다.

기아차는 신의칙을 내세워 노조의 청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과거 임금 협상에서 관례상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채 각종 수당을 정해왔는데, 이를 무시하고 추가임금을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어긋난다는 취지다.

그러나 재판부는 "노동자들이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에 의해 인정되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고, 수당의 근거가 되는 과거의 연장·야간·휴일근로로 생산한 이득은 이미 기아차가 향유했다"며 "(추가임금 청구가) 신의칙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기아차가 (이번 판결로 인해)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상황'에 놓일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아차가 2008∼2015년 당기순이익을 거뒀으며 1조∼16조원의 이익잉여금을 보유해왔던 점, 2008년 이후 매년 직원들에게 경영성과급을 지급해왔으며 그 금액이 한 해에 최대 7천871억원에 이르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이번 판결에서 인정된 추가임금이 이자까지 합해도 총 4천224억여원으로 기아차 직원들의 1년치 경영성과급 총액보다 낮은 수준인 점도 고려됐다.

기아차는 이번 판결이 모두 인정되면 최대 3조1천억 원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보다 훨씬 적은 액수가 인정된 점도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번 판결로 인정된 액수는 노조가 청구한 1조930억여원의 38%에 해당한다.

최근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보복과 미국 통상압력 등 기아차가 처한 경영 상황은 재판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기아차가 영업이익 감소를 입증할 증거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 판결은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가 제시한 판단 기준을 따른 결과다.

전합은 당시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이 낸 임금·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추가임금 때문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만 사측의 신의칙 주장을 인정해 '통상임금 제외' 합의가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