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극심한 자금난에 빠진 프랑스 해운사 CMA-CGM그룹과 현대상선이 조달한 금액이다. 액수는 비슷하지만 역할은 달랐다. 프랑스에선 정부 지원과 CMA-CGM의 자구노력이 동시에 이뤄졌다. 2013년 한꺼번에 5조원이 투입돼 대형화 경쟁에 뛰어드는 발판으로 활용됐다. 반면 현대상선의 5조원은 지난 10여 년간 해운업황 반등을 기다리며 생명을 연장하는 ‘산소 호흡기’ 역할에 머물렀다.
1997년만 해도 현대상선의 적재능력은 11만TEU로 9만TEU의 CMA-CGM을 앞섰다. 10년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CMA-CGM은 247만TEU(점유율 11.7%)의 세계 3위 해운사로 우뚝 선 반면 현대상선은 35만TEU(1.7%)로 14위로 밀렸다.
현대상선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으로부터 6000억~1조원의 투자 제안을 끌어왔다.
▶본지 8월21일자 A22면 참조
문제는 현대상선이 보유한 항만터미널 지분을 담보로 요구하는 블랙록의 투자 조건이다. 현대상선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이 ‘지분 투자에 담보를 요구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며 반대해 투자유치 협상은 무산 위기에 빠졌다.
무리한 투자 조건은 명분일 뿐이란 시각도 있다. 이제라도 CMA-CGM식 승부수를 던져보려는 현대상선과 기존 구조조정 방식을 고수하려는 산은 간 힘겨루기가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상선은 이번 투자 유치를 통해 최대 2조원을 증자해 단숨에 ‘세계 8위권’ 해운사로 도약한다는 복안이다. 반면 산은은 버틸 수 있을 만큼만 현대상선에 자금을 투입하며 해운업황이 회복하길 기다린다는 방침이다.
‘세계 8위권’은 해운업계 재편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해운사 숫자다. 전 세계 해운업계가 ‘최후의 8개사’에 들기 위해 합종연횡을 거듭하고 있다. 압도적인 1, 2위사인 APM-머스크(16.7%)와 MSC(14.5%)는 동맹을 맺었다. 4위 회사(COSCO·8.6%)가 5위사(CSCL)를 집어삼키는 지각변동도 일어났다. 지난 한 달 동안에만 COSCO가 7위 OOCL(3.1%)을 인수하고, 현대상선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일본 해운 3사(NYK·MOL·K라인)가 컨테이너선 사업부를 통합해 6위 해운사로 도약했다.
블랙록의 투자는 경쟁사 인수합병(M&A) 외엔 몸집을 불릴 방안이 마땅찮은 해운업계에서 현대상선이 단번에 덩치를 두 배 이상 키울 수 있는 기회다. 온갖 손실보전 장치와 이익보장 장치가 관례처럼 굳어진 한국 투자업계의 현실에 비춰볼 때 블랙록 제안이 무리수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산은의 기대대로 해운업 경기가 살아나고 현대상선도 기사회생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명을 이어가도 글로벌 대형화 경쟁 속에 세계 14위 현대상선은 다른 초대형 해운사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내 유일의 국적 원양선사인 현대상선이 갈림길에 섰다. 공은 산은에 넘겨졌다. 해운업계의 10년 앞을 내다보는 전략과 그에 따른 결정이 필요한 시기다. “블랙록 투자가 무산되고 해운 경기가 되살아나지 않으면 정부와 산은이 추가로 수조원의 혈세를 현대상선에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가 기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영효 증권부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