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등 판결문…법원 "좌파 배제·우파 지원은 국정기조"
"정책 입안 지시, 범행 지시로 보기 어려워"…특검은 "수긍 못해" 공방
朴, 블랙리스트 공범 아닌 이유…"국정기조 자체는 위법아냐"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 1심을 선고한 재판부가 '좌파 배제·우파 지원'이란 박근혜 정부의 국정 기조 자체는 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국정 기조를 강조하며 그에 따른 정책 입안을 지시한 것만으로는 박 전 대통령을 지원배제 범행의 공범이나 주도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러한 법원의 판단을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향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의 항소심과 박 전 대통령의 남은 1심 재판에서 치열한 공방이 불가피해 보인다.

31일 김 전 실장 등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당선 후 여러 차례 문화·예술계의 편향성을 지적한 점은 인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9월 30일께 수석비서관 회의(대수비)에서 '국정 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또 그해 12월 19일 당 최고위원 송년 만찬에서는 '좌파들이 갖고 있는 문화계 권력을 되찾아와야 한다.

나라가 비정상이다'라는 취지의 발언도 내놓았다.

재판부는 이런 과정에서 청와대나 문화체육관광부 보고 내용 등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된 정황도 파악했다.

신동철 전 소통비서관이 '문제 단체 조치 내역 및 관리방안 보고서'를 대통령 부속실로 보내 서면 보고했다고 진술한 것이 한 근거다.

모철민 전 교육문화수석 등도 법정 등에서 우수도서 심사방법이나 예술위 책임심의위원 개선, 독립영화관 지원 사업 개선 방안 등에 관한 문체부 보고를 청와대 양식의 서면보고서나 대수비 보고자료 등으로 정리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지원금 삭감 방안을 대통령에게 서면 보고한 후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을 통해 대통령의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는 지시를 전달받았다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진술도 있었다.

재판부는 이런 점들을 토대로 "문화예술계가 좌 편향돼 있어 이에 대한 시정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인식에 따라 청와대 내에서 '좌파 배제, 우파 지원'의 기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피고인들이 지원배제 범행을 실행하기 전이나 실행할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나 문체부에서 작성된 보고서 내용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보고받았을 개연성도 매우 크다"고 인정했다.
朴, 블랙리스트 공범 아닌 이유…"국정기조 자체는 위법아냐"
그러나 재판부는 이런 사정들만으로는 박 전 대통령이 지원배제 범행을 지시하거나 지휘함으로써 공모·공범(공모공동정범)의 책임을 진다고 보기엔 부족하다고 봤다.

판례상 공모했거나 공범의 책임을 물으려면 두 사람 이상이 공동의 의사로 특정한 범죄행위를 하기 위해 서로 일체가 되어 각자 자기의 의사를 실행에 옮기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그 근거들로 우선 "대통령은 보수주의를 표방해 당선됐고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을 그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며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가 헌법이나 법령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따라서 그런 국정 기조를 강조하고 그에 따른 정책 입안과 실행을 지시한 것을 두고 특정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범행을 지시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국정 기조에 따른 정책적 판단을 곧바로 직권남용으로 연결짓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아울러 "대통령이 지원배제 범행과 관련한 내용을 보고받았을 개연성은 크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보고 내용이 어떤 절차와 방식을 거쳐 어느 정도까지 대통령에게 보고됐는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일부 보고는 요약된 서면보고나 그보다 더 간략한 대수비 보고자료 형식으로 보고된 것으로 보여 범행과 관련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돼 대통령이 이를 승인이나 지시한 것으로 인정하기엔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문예지 지원이나 '건전영화' 지원, 보조금 집행, 종북 성향 서적의 도서관 비치 등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한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그와 같은 지시 내용 자체가 위법·부당한 것은 아니다"라며 "그러한 지시가 위법·부당한 방법으로 특정 문화예술계 개인·단체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는 범행 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s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