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친자 확인
신라 진성여왕은 895년, 오빠 헌강왕의 서자 요(훗날 효공왕)를 태자로 세웠다. 요는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만난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어서 친자(親子) 논란에 시달렸다고 한다. 여왕은 요의 신체적 특징을 거론하며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내 형제자매는 골격이 남다르다. 이 아이의 등 뒤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진실로 오빠의 아들이다.”(삼국사기 진성여왕편)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에게는 상인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아직도 따라다닌다. 진나라 정통성을 부정하고 싶었던 한 고조 유방의 추종 세력이 퍼뜨린 얘기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밖에 남아 있지 않아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고려 우왕도 공민왕이 아니라 승려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우왕이 처형장에서 웃옷을 벗으며 이렇게 절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우리 왕실은 대대로 용왕의 자손이라 몸에 용의 비늘이 있다. 내가 신돈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있겠느냐.”

고대에도 친자 감별법이 없진 않았다. 산 사람의 피를 죽은 사람의 뼈에 떨어뜨려 피가 스며들면 혈연관계가 성립한다는 ‘적골법(滴骨法)’이 대표적이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데다 테스트하려는 사람이 모두 살아 있을 때는 활용할 수 없었다.

중국 명나라 때에 와서야 살아 있는 두 사람의 친자 확인법이 등장했다. 물이 담긴 접시에 피를 떨어뜨리고 그 위에 다른 사람의 피를 떨어뜨린다. 피가 하나로 섞이면 친자 관계의 증거라고 해서 ‘합혈법(合血法)’이라 불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합혈법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서구에서 과학적 근거를 갖춘 친자 감별법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다. 혈액형의 특징을 이용한 것이어서 흔히 ‘ABO 혈액형 검사법’이라고 한다. 혈액형의 조합이 극히 제한적이어서 신뢰성이 낮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이 방법이 널리 사용됐다.

유전공학이 발전하면서 관련 기술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말에는 DNA를 활용한 유전자 검사법이 보급됐다. 손쉬워진 방법 덕분에 친자 확인 소송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 21일에는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친자 확인 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스페인 카탈루냐 고등법원이 검증용 DNA 샘플을 얻기 위해 달리 사후 28년 만에 그의 무덤을 열었다. 2007년부터 달리의 친딸이라고 주장해온 마르티네스라는 여인의 청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친딸로 확인되면 그는 달리가 남긴 4억유로(약 5213억원)의 25%를 상속받는다. 달리는 1989년 자식 없이 상속자도 지정하지 않고 사망했다. 죽어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살아서 몸가짐을 잘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