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여유를 닮은 사람들…비앙코 한잔에 저절로 '본 조르노 !'
헤르만 헤세가 사랑한 도시 스위스 르가노
이탈리아 땅이던 호수의 도시
가게 종업원도이탈리아어로 반겨
명물 화이트와인 비앙코 마시며 호수 바라보면 어느새 힐링
반전쟁 외쳤던 독일 대표 문호 헤세의 집
이젠 박물관서 전시품 된 타자기
토닥 토닥…나에게 말거는 듯
‘본 조르노!’ 기차역 앞 레스토랑, 아나 카프리의 종업원이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건넨다. 메뉴판에는 이탈리아식 요리가 빼곡히 쓰여 있다. 리소토를 먹을까? 파스타를 먹을까 고민하다 고개를 들자, 레스토랑 창밖 너머로 13세기에 지은 산 로렌초 대성당과 루가노 호숫가의 풍경이 한눈에 담긴다. 가파른 비탈을 따라 다닥다닥 모여 있는 주황색 지붕 건물들은 그림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다.
티치노 관광청 직원인 유타는 “난 독일인이지만, 스위스 남부의 온화한 날씨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쾌활한 사람들에 반해 여기 살고 있어요. 루가노의 또 다른 매력은 와인이에요. 호수 옆 산기슭에서 포도를 재배하는데 80%가 메를로죠. 대개 메를로 하면 레드 와인을 떠올리지만, 이 지역 명물은 가볍고 향긋한 화이트 와인 메를로 비앙코(Merlot Bianco)랍니다. 여름날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잔은 얼마나 상쾌한지 몰라요”라며 차가운 메를로 비앙코를 권했다. 일행들의 얼굴이 루가노의 햇살처럼 환해졌다.
호수 따라 흐르는 루가노의 낭만
호숫가 방향으로 언덕을 내려가자 구시가가 조금씩 속살을 드러냈다. 물 흐르듯 비탈진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구시가의 중심, 리포르마 광장(Piaza della Riforma)에 발길이 닿았다. 오렌지색, 레몬색 광장을 둘러싼 파스텔 빛 건물 1층마다 노천카페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광장에서 실핏줄처럼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골목과 멋스러운 거리도 도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리포르마 광장 옆으로 갓 구운 빵 냄새, 신선한 과일 향이 진동하는 좁은 시장 골목 페시나(Via Pessina) 거리가 이어진다. 소시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게 등 볼거리, 먹거리가 가득하다. 페시나 거리에서 조금만 가면 스위스 시계와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나싸 거리(Via Nassa)가 등장한다. 270m 길이의 아케이드에는 차양이 있어 여름에도 편안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나싸 거리 끝자락엔 ‘산타
마리아 델리 앙졸리 성당’이 있다. 규모는 아담해도 스위스에서 이름난 프레스코화를 품고 있다. 벽면을 가득 메운 프레스코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 베르나르디노 루이니가 남긴 걸작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고난을 마치 영화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이 벽화를 보려고 국경 넘어 루가노에 온단다. 성당 바로 앞이 드넓은 호숫가라 더욱 운치 있다. 성당 옆으로 현대적인 건물인 루가노 아트센터(LAC)가 시선을 끈다. 유리로 된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와 고풍스러운 흰 맨션이 두 팔로 광장을 끌어안은 듯한 모양이 마치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을 연상케 한다. 건축가 이바노 자레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듯 부담 없이 찾아와 전시와 공연을 즐기도록 이런 공간을 설계했다. 때마침 아트센터 로비에서는 관람객을 위한 무료 연주회가 한창이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자리한 도시답게 두 나라의 현대미술을 넘나드는 전시도 볼거리가 풍성했다. 2층 전시장의 끝 유리 파사드 너머로 마주치는 루가노 호수의 풍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한참 서성였다. 호수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도 잎사귀를 너울거리며 햇살을 받아들이고 있다. 가로수가 우거진 산책로 옆에는 치아니 공원이 있다. 플라타너스, 단풍나무, 떡갈나무 등 나무가 울창하고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는 시민들의 쉼터다. 공원 안에는 시립 미술관과 주립 도서관 등 다양한 시설도 있다. 루가노 사람들은 루가노 호수의 낭만을 제대로 누리는 방법으로 유람선을 꼽는다. 치아니 공원 옆 지아르디노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 호수 건너 캄피오네, 간드리아 등 과거 어촌 마을에 다녀올 수 있다. 그저 배에 느긋하게 앉아 호수에 비친 풍경을 감상해도 좋고, 원하는 곳에 내려 산책을 즐겨도 좋다. 그 가운데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아름다운 마을 간드리아(Gandria)가 인기다. 비록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 간드리아를 떠나 옛 가옥은 식당이나 별장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레스토랑이 많아 식도락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식사 후 영화 세트장처럼 아기자기한 골목 산책은 덤이다. 마을 뒤편에는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이 넓게 펼쳐진다.
헤르만 헤세의 발자취 찾아서, 몬타뇰라
루가노 호수를 여행할 때 몬타뇰라(Montagnola)를 빼놓으면 아쉽다. 몬타뇰라는 독일 소설가 헤르만 헤세가 196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작은 마을이다. 7월의 따뜻한 어느 날 저녁에 태어나, 그 시간의 온도를 알게 모르게 평생 좋아하며 찾아다녔다는 헤세는 운명처럼 루가노 호숫가 외딴 마을 몬타뇰라에 정착했다. 그 후로 43년간 몬타뇰라의 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글을 쓰는 시간 외에는 수채화를 그리거나 정원을 가꾸며 은둔형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전쟁과 군국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출판 금지를 당한 헤세에게 몬타뇰라는 제2의 고향이었다. 지금도 몬타뇰라에는 헤세가 살던 집과 정원과 묘지가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헤세가 글을 쓰던 집은 ‘헤르만 헤세 박물관’이 됐다. 헤세 박물관은 그의 둘째 아들 하이너 헤세와 개인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1997년 7월2일 헤세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문을 열었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와 초판본, 그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몬타뇰라행 버스 차창 밖으로 싱그러운 여름 풍경이 스친다. 버스에서 내리자 초록빛을 머금은 공기가 감돈다. 가슴을 쭉 펴고 몬타뇰라의 신선한 대기를 들이마신 후, ‘헤세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입구의 헤드폰에서 헤세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헤세의 초판본은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직접 책을 낭독해주는 코너가 있을 줄이야. 뜻밖에 횡재를 한 기분으로 한참 동안 헤드폰을 쓰고 헤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음성과 말투는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무척이나 선명하고 또렷했다. 2층 창가에는 헤세가 글을 쓰던 책상과 타자기가, 노란 벽에는 수채화가 걸려 있다. 무엇보다 직접 그린 그림을 곁들인 손편지와 엽서에 눈길이 갔다. 헤세는 독자들의 편지에 손수 답장을 써 보내길 좋아해 평생 3만5000장의 팬레터에 답했다. 헤세의 대표작 ‘데미안’을 번역한 작가 전혜린도 뮌헨 유학시절 그에게 답장을 받은 적이 있단다. 좋아하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이 곁들여진 편지를 받은 이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상상만으로도 설?다. 헤세는 결혼을 세 번 했는데, 세 번째 부인 니논과 헤세를 이어준 것도 편지였다. 니논은 헤세의 열혈 팬으로 그가 새 책을 낼 때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손편지로 헤세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결국 두 사람은 10년 넘게 서신을 주고받다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헤세 박물관에 이어 그가 즐겨 찾던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그의 묘지가 있는 생아본디오 교회로 향한다. 교회로 가는 길, 자연스럽게 ‘헤르만 헤세의 길’을 걷는다. 헤르만 헤세의 길은 실제로 헤세가 즐겨 걷던 루트를 산책로로 정비해 놓은 것으로, 헤세의 발자취를 찾아오는 팬들에겐 성지 순례길 같은 곳이다. 장소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 데다 이정표가 있어 따라 걷기 쉽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쭉 빼들고 보니 멀리 호수가 보인다. 왜 헤세가 이 오솔길을 걷다 수채화를 그렸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생아본디오 교회 앞엔 키 큰 나무들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일렬로 서 있다. 교회 마당 한쪽, 헤세의 묘는 소박했다. 다만 죽어서도 아내와 나란히 누워 몬타뇰라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고 있었다.
여행정보
스위스 루가노에 가려면 취리히 국제공항을 거쳐 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취리히 국제공항까지는 직항이 없어 파리나 암스테르담 등 유럽 주요 도시 공항을 경유해야 한다. 취리히에서 루가노까지는 기차 편이 많으며,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 창 너머로 아이맥스 영화처럼 상영되는 스위스의 멋진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 루가노에서 몬타뇰라까지는 평일에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 버스가 오간다. 루가노 역 뒤편에서 노란 포스트 버스를 타면 20분 만에 몬타뇰라에 도착한다. 주말에는 버스 운행이 줄어드니 시간을 확인하고 타는 게 좋다. 스위스의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취리히어인데 루가노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쓴다. 스위스 기후도 언어만큼 변화무쌍한데, 루가노는 연중 온화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다. 통화는 스위스프랑을 쓰며 전압은 230V로, 3핀 콘센트를 쓰고 있어 멀티 어댑터를 챙겨가야 한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루가노=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