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동 문화선임기자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어린 시절 그는 외톨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서 생각에 잠기던 아이였다. 대화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와 돌, 나비와 꽃 같은 자연물이었다. “나무야, 너는 왜 흔들리니? 꽃아, 너는 어떻게 그토록 다채로운 색을 갖게 됐니?” 바로 앞에 친구들이 있어도 눈길은 다른 데로 가기 일쑤였다. 부모님은 물론 스스로도 그게 병인 줄 알았다. 학교부터 군대생활까지 단체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은 그를 주눅들게 했다. 뿌리 깊은 열등감이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나 사물을 정상, 비정상의 이분법으로 봤을 때 얘기였다. 생각하기를 즐기는 자신의 특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몽상은 상상력으로 반전됐고, 열등감은 탁월한 능력으로 모습을 바꿨다. 40년째 기업을 운영하면서 미술품 컬렉터 겸 갤러리스트, 미술 작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한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66)이 주인공이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김 회장은 충남 천안에서 천안종합버스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충청점, 멀티플렉스 야우리 시네마(10개 관), 식음료점 등을 운영하는 기업인이다. 또한 국내외에 3개의 갤러리(천안·서울·상하이)와 5개의 미술관(서울 1개, 제주 4개)을 운영하는 갤러리스트이자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3700여 점이나 사들인 세계적인 컬렉터다. 1999년부터는 ‘씨킴(CI KIM)’이란 이름으로 작품 활동에도 나서 2년마다 개인전을 열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 5월23일부터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아홉 번째 개인전 ‘(논)-논다 놀아’를 열고 있다. 1일에는 2014년 진출한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를 이 도시의 차세대 문화특구인 웨스트번드(西岸)로 확장 이전해 개관전 ‘아시아의 목소리’를 개막한다. 지난 29일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김 회장을 만나 미술로 인생역전을 일궈낸 이야기를 들어봤다.

▷천안이 고향인가요.

“아닙니다. 1951년 1·4후퇴 직후에 부산에서 태어나 8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 자랐으니 서울 회현동이 고향이죠. 천안은 제2의 고향입니다.”

▷처음부터 천안에서 버스터미널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人사이드 人터뷰]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난, 미술에 빠진 몽상가…작품수집·사업·작가로 아트처럼 살죠"
“군 제대 후 3수를 해서 대학(경희대 경영학과)에 들어가 1978년에 졸업했습니다. 그해 4월 사업을 하시던 어머니가 채권 대신 인수한 천안역 앞의 버스터미널을 저한테 관리해보라고 맡겼죠. 부모님은 이북 출신인데 뭐든 공짜가 없어요. 당시 돈으로 한 달에 300만원씩 저한테 세를 놓은 겁니다. 터미널을 맡고 보니 한 달에 300만원씩 적자였어요. 그래서 임대한 매점을 모두 직영 체제로 바꾸고 허름한 가게를 알루미늄으로 직접 다 고쳤죠. 상품도 팔릴 만한 것들로 갖춰놓으니 6개월 만에 적자를 면했고, 1년 후에는 억대 이익을 남길 수 있게 됐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상상한 것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현실에 적용한 결과였습니다.”

▷터미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건 언제였습니까.

“천안역 앞은 너무 복잡해 1980년부터 아라리오 스몰시티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1989년 6월에 여기로 옮겼습니다. 당시 돈으로 250억원을 투자해 6만6000㎡(약 2만평)에 버스터미널을 세우겠다고 하니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어요. 당시 천안 인구가 20만 명 정도였는데 100명 중 99명은 반대했죠. 천안시에서도 1만6500㎡(약 5000평)만 하자는 걸 제가 ‘좀 더 쾌적한 시설을 만들려면 넓게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지금은 터미널이 모두 백화점, 영화관, 식음료점 등을 갖춘 복합시설이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은 곳은 다 망했고요. 저는 이런 걸 어릴 때부터 상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선견지명을 가질 수 있었죠?

“1980년대를 전후해 세계적으로 자동차가 급증했습니다. 옛날 도시들은 자동차보다 사람 위주의 길이어서 대부분의 도시가 과밀화된 구도시를 버리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대형주차장을 갖추는 추세였죠. 더 편리하고 쾌적한 걸 찾게 될 미래를 생각하면 백화점, 식당, 터미널, 영화관 등이 다 있는 복합시설이 불가피했어요. 일찍부터 세계 백화점과 미술관을 다니면서 저는 그걸 알았죠.”

▷미술품 수집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영국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채러티’
영국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채러티’
“사업을 시작하고 몇 달 지나서였습니다. 서울 인사동을 지나가다 문득 남농 허건, 청전 이상범의 작품을 사게 됐어요. 당시 돈으로 100만원 안쪽의 소품이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천안에서 사업하면서도 서울에 자주 가서 인사동, 북촌 일대를 자주 쏘다녔거든요. 그러면서 운명적으로 그림이 온 것 같아요.”

▷수집을 넘어 미술관을 꿈꾼 이유는 뭘까요.

“1978년 그림을 사기 시작한 뒤였습니다. 비가 온 뒤 남산 밑에 큰 무지개가 생겼는데 그걸 보고 전율과 희망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1981년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에서도 희망과 전율을 똑같이 느끼겠더라고요. 어릴 때 화가나 미술관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미술이나 미술사를 공부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미술관이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전율과 희망, 생명과 꿈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저로 하여금 미술관을 꿈꾸게 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제 작품에는 그런 무지개의 색채가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 밭에 그런 씨가 뿌려졌나 봅니다.”

김 회장은 지금까지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영국 현대미술의 ‘전설’로 통하는 데미안 허스트, 독일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등 세계적인 작가는 물론 중국, 인도 등 각국 작가의 작품 3700여 점을 사 모았다. 2002년과 2003년에는 허스트의 작품을 수십억원씩 주고 사들여 국내외를 놀라게 했다. 투자자라면 ‘빅딜’을 한 셈인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김 회장은 구입한 작품을 되팔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로지 미술관 전시용이다.

▷비싼 작품을 구입할 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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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죠? 팔지도 않을 거면서 값비싼 작품을 사는 것이 말입니다. 허스트 작품은 200만달러짜리를 160만달러에 샀어요. 20억원쯤 되니 다들 저한테 이상하다고 했죠. 다들 허스트가 누군지도 몰랐거든요. 사실 저도 잘 이해가 안 돼요. 본능이나 직감 같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무거나 막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딱 봐서 좋다 싶으면 10분 안에 거의 결정합니다. 대신 철저히 작품은 직접 보고 결정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비행기를 900번 이상 탔어요. 제가 대한항공 밀리언멤버예요. 중국은 아시아나항공으로 가는데 그걸 빼고도 그렇습니다.”

▷직감이나 직관에 의존해 실패한 적도 있나요.

“실패가 많았죠. 작품을 살 때 하나만 놓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러 개 놓고 그중 하나만 선택할 경우 실패란 상대적인 겁니다. A, B, C, D 중 C를 사야 하는데 D를 샀고, 나중에 C를 미술관에 걸고 싶은데 작품값이 너무 올라서 못 걸게 되면 그게 실패죠. 그러나 내가 좋아서 산 거라면 실패가 아닙니다. 작품값도 물론 중요하지만 좋아서 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 산 거니까 실패란 없는 거죠.”

▷잘 산 경우도 많았습니까.

“허스트의 작품은 지금 800만달러(약 80억원) 이상 나갑니다. 키스 해링의 노란색 작품 ‘줄리아’는 25만달러였던 게 지금 800만달러 정도 하고요. 그래도 저는 팔지 않습니다. 경매회사에서 팔자고 이따금 오지만 안 팔아요. 천안 시민들 것이니까요.”

▷혼자서만 좋아서는 안 되지 않나요. 보편성을 띤 안목은 어떻게 길렀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늘 상상하고 사물과 대화를 해왔어요. 남들이 반대해도 허스트 작품을 10분 만에 살 수 있었던 건 작품과 대화했기 때문입니다. 돌이나 나무와도 얘기했는데 그림하고 얘기를 나누는 건 더 쉽죠. 저는 외국에 나가도 카지노나 관광은 해본 적이 없어요. 미술관, 백화점을 보고 나면 그날 저녁엔 호텔에서 낮에 본 걸 되새깁니다. 나무와 이야기하듯이 말이죠. 그렇게 10년, 20년 지나니 그게 기술이 되더라고요. 작품은 남이 권해서 사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산 작품을 남들이 팔라고 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저는 자문역도 없고 혼자서 모든 걸 합니다. 그것도 운명이죠. 자료에 의해 분석하는 게 아니라 운명적으로 만난 작가들, 어떤 기회에 본 작품들 중에서 사는 거죠.”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김창일 회장은 성공한 기업인이다. 그가 운영하는 터미널, 백화점, 영화관, 식음료점 등은 비상장사여서 번 돈을 어떻게 쓰든 자유롭다. 하지만 애써 번 돈을 대부분 미술사업에 쏟아붓는다면 힘들지 않을까.

▷미술품 구입이나 미술관, 갤러리 운영에 너무 많은 돈이 들지 않나요.

[人사이드 人터뷰]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난, 미술에 빠진 몽상가…작품수집·사업·작가로 아트처럼 살죠"
“버스터미널 사업을 혼자 마음대로 하면서 억대를 벌었고, 현재와 같은 사업 구도를 38세에 완성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사치스럽게 살 줄 몰라요. 가족들도 그렇고요. 제주도 작업실에선 혼자 밥을 해 먹습니다. 미술 덕분에 열심히 살 수 있어서 좋아요. 아직도 미술관을 더 짓고 싶은데 돈이 너무 많이 드니 계속 벌어야죠. 남들이 꿈꾸는 좋은 차, 안락한 생활 대신 저는 좋은 그림과 미술관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으니 그렇게 살 겁니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술이죠. 28세에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저는 열등감과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저를 구해준 것이 예술입니다. 미술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살렸고, 전율과도 같은 감명을 줬습니다. 아트는 제게 호사가 아니라 생명과 영혼과도 같습니다. 버려진 마네킹에 보통 사람이 물감을 칠하면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제가 작가로서 그걸 하면 치유하는 겁니다. 열등감을 털고 난 뒤로는 뭘 해도 무섭지 않습니다. 예술 덕분에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런 경험이 사업에도 적용됩니까.

“물론입니다. 사업도 아트의 개념과 방식을 적용한 결과 지금까지 성장해왔죠. 극장이나 터미널, 레스토랑 등을 좀 더 고급스럽게, 예술적 감각을 살려 만들려고 할 때 ‘적당히 하지. 이게 뭐냐’며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은 다 문을 닫았습니다. 사업이나 컬렉션, 미술작업에 경계를 두지 마세요. 저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입니다. 불도저로 밀어붙이던 시대는 끝났어요. 이제는 사업에도 감각적 요소와 디테일이 없으면 오래 못 버텨요. 한 매체가 전국의 상권을 분석한 결과 아라리오가 아홉 번째였어요. 상위 8개는 서울에 있고, 한강 이남에선 우리가 넘버원이죠. 천안이 대구, 부산을 제치고 1등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350여 개 국내 극장 가운데 우리 극장이 9등입니다. 이 역시 한강 이남에선 넘버원이죠.”

김 회장은 남다른 안목과 과감한 투자로 세계적 컬렉터의 반열에 올랐다. 중소도시 기업인이 돈 좀 벌었다고 이상한 짓 한다는 시선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국내외 갤러리, 미술관 등을 통해 그의 진심이 전해진 결과다. 그는 “미술관을 열고 실제로 보여주니 이제 80~90%는 내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며 “그간 힘들었던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무한 투자를 할 수 없지 않나요. 경영성과를 내야 할 텐데요.

김창일 회장이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작업실에서 낡은 카펫을 캔버스 삼아 붓질을 하고 있다.
김창일 회장이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작업실에서 낡은 카펫을 캔버스 삼아 붓질을 하고 있다.
“미술관은 다른 분야와 라이프사이클이 달라요. 콩나물은 1주일, 인삼은 6년, 산삼은 10년 하는 식으로 수확 기간이 있듯이 미술관은 카페나 레스토랑과 달리 문을 열자마자 돈이 들어오지는 않죠. 물론 제가 생각하는 기간은 있어요. 준비한 계획도 있고요. 갈 길이 멀죠. 그래서 직원들에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인삼을 심어놓고 6년을 기다린다고 다 질 좋은 게 나오는 건 아니듯이 미술관도 잘 관리하고, 사람들한테 생명과 영혼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의 유명 작가를 20억원 주고 데려와서 30억원을 벌자는 식으로 해선 안 되죠. 다행히 옛 ‘공간’ 사옥에 문을 연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건축,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1주일에 서너 팀씩 올 정도로 반응이 좋습니다.”

▷쉬운 길로 가자는 유혹도 있을 텐데요.

“소규모 영화관, 모텔로 쓰이다 버려진 제주도의 폐건물을 개조해 미술관을 만드니 여행사에서 관광객을 하루 500명씩 데려올 테니 이익을 나누자고 해요. 절대 하지 말라고 지시했죠. 한 사람이라도 감동 받으면 그걸로 족하니까요. 정말로 감동해서 1년에 네댓 번 온다는 젊은이도 있으니까요. 15년, 20년 전엔 뉴욕현대미술관도 지금처럼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이 필요해요.”

▷버려진 것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제주 탑동 시네마미술관은 1999년 5개 상영관으로 개관한 곳인데 CGV, 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문을 닫았죠. 저기에 미술로 생명을 불어넣고 살리자고 생각했어요. 서울의 공간 사옥도 마찬가지였죠. 남들은 90억원이라는 감정평가서만 보고 150억원이라는 가격을 마다했지만 저는 그 가치가 200억원은 된다고 봤어요. 지금은 모두가 잘했다고 하죠. 작품에도 버려진 마네킹이나 냉장고 등을 소재로 활용하는데 미술이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김 회장은 1일 상하이의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는 웨스트번드에 1000㎡ 규모의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를 이전, 개관한다. 2014년 상하이 헝산가에 개관한 기존 갤러리보다 3배가량 커졌다. 웨스트번드는 상하이 시 정부가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문화특구다. 황푸강을 따라 11㎞나 되는 지역에 2019년까지 유럽, 북미 등의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을 유치할 계획이다.

▷2005년 진출한 베이징에서는 몇 년 후 철수했는데, 왜 상하이입니까.

“중국은 리스크가 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미래 가능성을 알면서도 도전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에요. 앞으로 세계미술에서 베이징보다 더 중요한 곳이 상하이입니다. 아라리오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거든요. 그러자면 중국이 필요해요. 누구나 중국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상하이에 도전하는 겁니다. 지금 중국에서 한국 갤러리는 아라리오가 유일해요. 많을 땐 상하이에만 20~30개가 있었으나 다 철수했어요. 지금도 세계 유수 갤러리들이 상하이에 진출하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한·중관계가 좋지 않은데 중국이 아라리오를 좋게 평가하는 이유는 뭔가요.

“2005년 베이징 진출 때부터 아라리오는 중국에서 외국 작품을 보여준 곳으로 유명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아라리오가 하나의 획을 그은 셈이죠. 그런 게 중국 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고, 2015년 중국이 뽑은 좋은 갤러리 1등을 아라리오가 차지했죠. 이번에는 미국 최대 갤러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갔어요. 가장 중심이거든요. 런던갤러리도 우리와 자리를 놓고 경합하다 밀렸고요. 중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양국 관계는 나빠도 더 좋은 조건으로 들어갔어요.”

▷아라리오는 국내 최초로 전속작가 제도를 도입한 갤러리죠.

“한국인 25명, 중국인 12명 등 37명의 전속 작가를 두고 있습니다. 갤러리가 생존하려면 전속 작가가 없으면 안 되죠. 작가 역시 전속이 안 되면 생존하기 어렵고요. 얼마나 좋은 전속 작가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갤러리의 생존을 좌우할 겁니다. 아라리오가 아시아 작가들을 중시하는 이유입니다.”

김 회장은 갤러리 5층의 작업실에서 틈날 때마다 작업에 몰두한다. ‘가진 자의 고상한 취미놀음’ 정도로 남들은 여겼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전에도 매장의 조경이나 인테리어 등을 직접 공사했기 때문에 달라진 건 없다”며 “일은 같은데 일하는 사람이 사업가에서 작가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다. 사업가와 컬렉터, 갤러리스트, 작가의 1인 다역(多役)을 마치 하나의 일처럼 해내는 그는 성공비결이 단순했다. “다른 사람은 늘 현재를 생각하지만 나는 항상 미래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 김창일 회장이 직접 꾸민 공원

"빨간가방 앞에서 보자"…천안 시민 '만남의 광장' 된 조각공원


[人사이드 人터뷰]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난, 미술에 빠진 몽상가…작품수집·사업·작가로 아트처럼 살죠"
‘아라리오갤러리 천안’과 나란히 있는 신세계백화점 충청점 앞 조각광장은 충남 천안의 새로운 명소다.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이 1989년 이곳을 버스터미널, 백화점, 영화관, 갤러리 등을 함께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개발하면서 조각공원을 조성했다. 그해 처음 선보인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수백만마일-머나먼 여정’을 비롯해 28점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국내 조각공원 중에선 단위면적당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데미안 허스트, 키스 해링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덩치 큰 작품을 가져다 놓아 작품가 총액도 국내 최고로 평가된다.

2000년과 2002년 설치된 영국 작가 허스트의 ‘찬가(Hymm)’와 ‘채러티(Charity)’는 세계 미술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울도 아닌, 한국 중소도시 기업인이 200만달러(약 20억원)나 되는 허스트의 작품을 구입한 것 자체가 뉴스였던 데다 이를 야외 조각공원에 상설 전시해 더욱 주목받았다.

미국 뉴욕 지하철 역의 낙서작가로 유명한 해링의 ‘줄리아(Julia)’도 현대미술의 연대기와 같은 조각광장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했다.

인도를 대표하는 수보드 굽타의 ‘통제선(Line of Control)’, 한국의 젊은 작가 김인배의 ‘사랑해’, 일본 작가 코헤이 나와의 ‘매니폴드(Manifold)’도 설치돼 있다. 매니폴드는 높이 15m, 무게 약 27t에 이른다. 기획부터 제작, 설치까지 3년이 걸린 초대형 아트프로젝트다.

조각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한국 작가 씨킴의 2002년 작품 ‘빨간 가방’(사진)이다. “신세계백화점 빨간가방 앞에서 보자.” 천안 시민들이 친구나 지인과 약속 장소를 정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씨킴이 김 회장이다. 그는 “백화점에 찾아오는 젊은 고객을 위해 백화점다운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빨간 가방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조각광장에 있는 여러 작품 중에서도 눈에 가장 잘 띄는 덕분에 약속 장소로 인기다.

2007년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 이 조각광장은 국제적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인 컬렉터로 인정받고 있는 김 회장이 수집한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어서다. 독일의 저명한 예술지 ‘아트’는 이곳을 한국에 가면 꼭 들러야 할 장소로 소개하기도 했다.
[人사이드 人터뷰]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난, 미술에 빠진 몽상가…작품수집·사업·작가로 아트처럼 살죠"
천안=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