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도전했습니다. 중요한 콩쿠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저의 나태함과 자만 때문이었죠. 이번에는 평소보다 5~6배의 노력을 쏟았습니다.”

지난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사진)은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태함으로 인생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며 “우승했다는 기쁨보다 속이 후련해서 더 좋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이미 해외 콩쿠르에서 일곱 번 우승을 차지한 ‘콩쿠르의 왕’이었다. 그러나 세계 4대 콩쿠르(쇼팽, 차이코프스키, 퀸 엘리자베스, 반 클라이번)에선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조성진이 우승한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선 예선 탈락의 아픔까지 맛봤다. 절치부심하는 가장 큰 계기였다.

수개월 전부터 착실히 준비한 결과 그렇게 기다리던 메이저 콩쿠르 우승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공인’받는 또 한 명의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선우예권은 대회가 끝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우승이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 듯했다. “결선 진출자를 호명할 때 제 이름을 듣고 일어나다가 살짝 휘청하며 의자에 부딪혔어요. 많이 긴장했었나 봅니다. 우승 후 연주 외적인 부분에서 스케줄이 많아졌는데도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네요. 하하.”

그는 콩쿠르에 도전할 때마다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고 소개했다. 준비와 동시에 지인들과 연락을 끊는다. “콩쿠르를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엄청 큰 스트레스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응원을 해줘도 그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와 지인과 연락을 잠시 중단합니다. 어머니에게도 메시지를 안 드릴 정도입니다.”

결선 무대에서 선우예권은 그동안 쌓은 내부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5중주’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관객은 기립 박수로 환호했고, 심사위원단은 그에게 최고점을 줬다.

선우예권은 다른 연주자보다 다소 늦은 나이인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미국 커티스음악원, 줄리아드음대, 뉴욕 메네스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독일 하노버국립음대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

해외 콩쿠르에서도 잇따라 입상했지만 국내 대중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번 우승으로 단번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오는 12월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리사이틀은 우승 소식 직후 매진됐다. 표를 못 구한 사람을 위해 12월15일 공연을 추가할 예정이다.

그는 “이번 우승이 대중적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됐는데 많은 관객이 연주회를 찾아줘 감사할 따름”이라며 “연주자로서 그보다 더 행복한 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해외 공연 일정도 꽉 찼다. 이번 우승으로 다음달부터 내년 6월까지 40여 회에 걸쳐 미국 전역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았다. 미국 아스펜뮤직 페스티벌, 독일 하이델베르크 페스티벌 등에도 참여한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실황을 녹음한 앨범은 데카 골드 레이블을 통해 8월 발매된다. 그는 “음악을 하면서 느낀 치유와 행복, 위로의 감정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진실한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