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선진적인 지배구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선진적 지배구조의 핵심에는 이사회 중심 경영이 있다.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등기 임원의 법적 책임 및 급여 공개 등이 이슈가 되면서 최대주주들이 등기를 회피하기도 한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은 바람직할 수도 있다. 심각한 것은 최대주주가 등기는 하지만 이사회를 소홀히 하는 행태다. 시민단체의 문건에 따르면 한 회사는 대규모 투자에 계열사가 각각 이사회를 열어 투자 안건을 적법하게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최대주주들이 이들 계열사 이사회에 모두 불참했다고 한다. 또 회사 경영진의 의사결정으로 인해 혹시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을 때도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사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즉 최대주주는 대표이사로서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이 투자활동과 관련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향후 발생할지도 모를 책임논란으로부터는 자유롭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의사결정에 대해 소송이 제기된다고 하면 사내, 사외이사들만이 피소(被訴) 대상이 될 것이다. 최대주주가 책임 경영하는 모습과 형식을 갖췄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사회 중심이 아닌 경영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외이사라면 국민연금 등이 이사회 참석률 등에 근거해 주총에서 사외이사 선임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상근 사내이사의 경우, 특히 최대주주들은 이사회 중심 경영이라는 취지의 제도에 부응해 이사회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며 이사회 내에서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시민단체들이 최대주주의 전과 등을 이유로 이사 선임에 반대하기도 하지만 이사회를 존중해 참여했는지도 이사 선임의 동의·반대에 중요한 잣대가 돼야 한다. 등기를 한 이후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사회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사회 제도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경영의사결정을 수행하면서도 외견상으로는 제도에 순응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이를 책임경영으로 볼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회계에서는 지배회사가 종속회사에 어느 정도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면 종속회사의 영업 결과를 지배회사의 재무제표에 반영하는 지분법 회계를 수행한다. 수년 전에도 지배회사가 지분법 회계를 수행하지 않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지분법 적용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의사결정 요건 중 하나가 경영의사 결정에 대한 영향력 여부인데 그 당시도 최대주주가 등기이사이기는 하지만 이사회에 불참했으므로 경영의사결정에 참여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등기이사인 최대주주가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사회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경영의사결정 참여 여부는 이사회에 참석했는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행태는 제도를 악용하는 것이다. 오히려 등기를 하지 않는 것이 떳떳하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회사라고 실질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등기를 한 이후에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기만행위로 볼 수도 있다.

최대주주는 정도(正道) 경영을 해야 한다. 등기를 했으면 이사회에 참여해 사내·사외이사들과 주주와 회사를 위한 고민을 공유해 줄 것도 주문하고 싶다. 현재는 사외이사의 이사회 참석 정보만 공시되는데 사내이사들의 참석현황도 공시 대상이 돼야 한다. 사외이사들이 등기를 하고 이사회에 불참하는 최대주주에게 왜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느냐고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대주주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행동에 옮겨야 할 뿐이다. 사외이사들이 이 역할을 못 한다면 기관투자가라도 나서야 한다. 이것이 시장의 힘이다.

손성규 < 연세대 교수·한국회계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