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대통령 공약 가운데 ‘광화문 대통령’을 주목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의 취임사에서도 권위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며 준비를 마치는 대로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청와대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청와대 서쪽에는 국가문화재인 칠궁(七宮)이 있다. 청와대 서별관과 영빈관에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자리다. 칠궁은 조선의 국왕과 대한제국의 친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칠궁은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을 건설한 데서 시작된다. 영조는 국왕이 된 직후 숙빈묘(淑嬪廟)를 세웠고, 20년 뒤 이름을 육상궁(毓祥宮)으로 바꿨다. 육상궁이란 ‘상서로운 존재인 국왕을 길러낸 분의 사당’이란 뜻이다. 영조는 경복궁을 방문할 때마다 이곳에 들러 모친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심을 표현했다. 육상궁 건물은 칠궁에서 가장 장중하며, 냉천정(冷泉亭)이란 정자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다.

국왕의 생모를 모신 사당을 세운 것은 영조 이전에도 있었다.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하면 3년상을 지낸 뒤 종묘로 모시지만, 후궁은 종묘에 모시지 못하므로 따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경종은 국왕이 된 후 생모인 장희빈을 모신 대빈궁을 세웠다. 장희빈은 한때 왕비가 됐다가 빈으로 강등됐고, 경종에 의해 대빈(大嬪)이 됐다. 영조는 육상궁 이후에도 원종을 낳은 인빈의 저경궁과 장조(사도세자)를 낳은 영빈의 의열묘(선희궁)를 세웠다. 또 정조는 진종(영조의 큰아들이며 정조의 양부이나 즉위 전에 요절)을 낳은 정빈의 연호궁을, 순조는 생모인 유빈의 경우궁을 세웠다.

별도로 있던 후궁의 사당들이 육상궁으로 모인 것은 1908년이다.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국가 제사를 통폐합했고, 위에서 언급한 사당들은 합쳐져 육궁이 됐다. 가장 나중에 옮겨진 사당은 영친왕을 낳은 엄귀비의 덕안궁이다. 덕안궁은 1911년 엄귀비가 사망하면서 경운궁 안에 있다가 1913년 태평로에 세워졌고, 1929년 육상궁으로 들어와 칠궁이 됐다.

해방 이후 칠궁은 종묘나 궁궐처럼 일반 시민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 그러나 1968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면서 청와대 경호를 이유로 시민의 관람이 금지됐다. 칠궁은 2001년 11월 다시 개방됐지만 이곳을 방문하려면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방문객은 희망하는 날에서 적어도 20일 전에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람 신청을 해야 한다. 관람 당일에는 경복궁 주차장으로 와서 신분 확인을 받은 뒤 버스를 타고 청와대 홍보관으로 이동한다. 이후 청와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정해진 코스를 따라 이동하고, 청와대 서문을 나온 뒤에야 칠궁을 방문할 수 있다. 바로 칠궁에 가지 못하는 것은 청와대 경호 때문이다.

칠궁은 종묘와 함께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주인공을 모신 사당이며,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다. 칠궁의 가장 오른쪽에는 육상궁 건물이 있고, 그 왼쪽으로 네 동의 사당이 늘어서 있다. 사당 건물 앞에는 정문과 재실이 있고, 건물을 둘러싼 정원에는 정자와 소나무, 연못, 축대 등이 어울려 한국 전통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문 대통령은 ‘열린 경호’를 강조하며 시민들의 사진 촬영에도 기꺼이 응하고 있다. 권위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며 집무실을 여민관으로 옮겨 참모들과 실시간으로 대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청와대 경호를 이유로 칠궁의 방문을 제한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필자는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기 앞서 칠궁을 돌려줄 것을 제안한다. 경복궁을 방문한 시민이 북문인 신무문을 나가서 효자동삼거리를 거쳐 바로 칠궁으로 갈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