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끝) '고독한 결단'이 박수 받았다
전두환, 1980년대 긴축 정책…체질 개선으로 경제 업그레이드
김대중, 노사정위 출범…IMF 협력 받고 대외신인도 회복
노무현, 자이툰 부대 파병…한·미 동맹 강화 지렛대 역할
1981년 여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장관들에게 엄포를 놨다. 일부 경제부처 장관들이 안정화 시책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직후였다. 당시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강력한 긴축 정책을 폈다. 긴축은 모두에게 고통스러웠다. 기업들은 흑자도산하게 생겼다고 아우성쳤다. 농민들은 추곡수매가 인상 억제에 극렬 반발했다. 표심을 의식한 여당에선 “정치적으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전 전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았다. 뚝심 있게 안정화 시책을 밀어붙였다. 1980년 28.7%에 달한 물가상승률은 1983년 3.4%까지 내려갔다. 경제성장률은 -1.7%에서 13.2%로 높아졌다.
대통령은 ‘고독한 결단’을 내리는 자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국정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여론이 마다하는 일, 시끄러운 일도 감당해야 한다”고 적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 모두가 당대에 큰 지지를 받은 건 아니었다. 국익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다수 국민의 반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때론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독은 짧고 영광은 영원하다. 후대는 대통령들이 마주한 ‘고독의 순간’을 빛나는 업적으로 기억한다.
◆“비난에도 인심 쓰듯 돈 풀 수 없어”
1980년은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이 ‘성장’에서 ‘안정화’로 대전환을 이룬 해로 기억된다. ‘쿠데타’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큰 위기에 봉착한 시기였다. 중화학공업화의 한계가 뚜렷해진 시점에 ‘2차 오일쇼크’가 밀려왔다. 경기는 내려앉고 물가는 요동쳤다.
엉망이 된 경제를 놓고 고심하던 전 전 대통령은 성장 대신 물가부터 잡는 ‘안정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먼저 정부의 씀씀이부터 대폭 줄였다. 중화학공업 지원금과 수출 기업 보조금은 물론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추곡수매가 인상률도 깎았다.
인기 없는 정책 추진에는 인간적 고뇌가 뒤따랐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각계각층의 비난과 반발로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지만 인심 쓰듯 돈을 풀 수는 없었다”고 털어놨다. 물가상승세가 확실히 꺾이자 자연히 민간의 저축률이 올라갔다. 늘어난 투자 재원을 토대로 경기가 활성화되는 선순환이 만들어졌다. 경제 체질을 개선한 한국은 1986년부터 찾아온 ‘3저(低) 호황’을 만끽하며 세계 시장에 우뚝 섰다. 전 전 대통령이 군사 독재와 인권 유린이라는 오명을 남겼지만, 그의 뚝심이 경제를 한 차원 도약시켰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DJ, 외환위기 극복 위해 노조 설득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재임 기간 끈기 있게 경제·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외환위기 초입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며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 부문 개혁을 밀어붙였다.
DJ는 당선인 시절부터 ‘노사정위원회’ 출범에 온 힘을 쏟았다. 노사정위는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정리해고제 도입 등 노동 유연화를 위해 필수적인 기구였다. 처음엔 노동계와 재계 모두 미온적이었다. 특히 노동계는 “정리해고제 도입을 위한 노사정위 참여는 거부하겠다”고 맞섰다.
DJ는 한국의 대외신인도 회복을 위해 노동 유연화는 피할 수 없다고 봤다. 그는 “IMF의 협력을 받고 투자를 유치하려면 정리해고 도입이 불가피하다”며 끈질기게 노동계를 설득했다. 이해 당사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합의제 기구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노사정위는 정리해고와 파견제 도입 등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국을 통상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자유무역협정(FTA)의 물꼬를 튼 것도 DJ였다. 칠레와의 FTA는 이후 한·미 FTA 추진으로 이어졌다. 농산물 개방 피해를 우려한 농민들의 극심한 반대가 뒤따랐다. DJ는 “자원이 부족한 우리가 장사로 돈을 벌려면 FTA뿐”이라며 농민들을 설득했다.
◆노무현, 지지층 반대에도 이라크 파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는 한국 통상외교의 대표적인 성공작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지층 등 상당수 국민의 반대에도 “한·미 FTA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라며 협상을 독려했다. ‘좌측 깜빡이 넣고 우회전한다’는 비아냥도 개의치 않았다.
2013년 이라크전 파병 역시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릴 수 있는 사안이었다. 청와대 등 정권 핵심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파병을 거절했을 때 미국이 갖게 될 섭섭함이 한·미 간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며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당시 파병 외교는 대통령 당선 후 서먹해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