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시리즈로 유명한 안영일 화백이 붓 대신 휜 나이프로 작업하고 있다. 현대화랑 제공
‘물’ 시리즈로 유명한 안영일 화백이 붓 대신 휜 나이프로 작업하고 있다. 현대화랑 제공
미국에서 활동 중인 안영일 화백(84)은 1983년 초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비치에서 경험한 바다의 감흥을 잊을 수 없다. 평소 바다낚시를 즐기던 그는 그날도 배를 타고 아무 생각 없이 파도에 떠밀려 갔다. 갑자기 주변이 안개로 뒤덮이면서 방향을 잃었다. 형언키 어려운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파도 위에 진주를 뿌려놓은 듯 영롱한 빛과 함께 환희가 몰려왔다. “아!” 탄성이 나왔다. 개안(開眼)과 같은 경험을 한 그는 거대한 생명으로 살아 숨쉬는 바다와 단 한 번도 같은 빛깔과 몸짓을 되풀이하지 않는 파도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물’ 시리즈는 이렇게 태어났다.

‘물의 화가’로 유명한 안 화백이 지난 16일부터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현대화랑에서 31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는 사각의 작은 색점들로 화면을 빼곡히 채운 1990년대 이후의 ‘물’ 시리즈 대작 30여점을 걸었다. 전시는 다음달 16일까지 이어진다.

안 화백은 서울대 미대 재학 중이던 1957년 주한 미국대사관이 주최한 공모전에 입상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시카고 헐하우스갤러리에 초대돼 한국인으론 처음 미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천재성에 미국 화단은 주목했고 현지 화랑의 전속 작가로 기용됐다. 여러 차례 어려움도 겪었다. 2015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바깥 출입도 못했다. 그래도 붓을 놓지 않았다. 현대미술의 선진국인 미국 화단에서 ‘물’ 하나로 역량을 입증한 그의 열정이 대단하다. 안 화백은 “그림은 이제 나와 분리될 수 없는 것, 바로 나 자신이 됐다”며 “바다와 파도는 내게 있어 존재의 표현이자 이유이며, 소통이고 해방”이라고 말했다.

그가 캔버스에 표현하는 바다와 파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단순한 물이 아니다. 내면 깊이 잠재한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색점들은 공기와 소리,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햇볕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의 입자들을 연상시킨다. 색점으로 물을 만들고, 화면 위에서 물빛이 움직인다. 바다와 파도는 안 화백이 현실에서 이루려는 영원한 주제인 셈이다.

그는 붓으로 색을 칠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주걱 모양의 나이프로 색을 찍어 바른다. 붓보다 훨씬 정교하고 투명하게 색을 표현할 수 있어서다. 안 화백은 “바다와 파도의 영험했던 체험을 좀 더 뚜렷하게 각인시키려고 나이프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빛을 받아 순간순간 변하는 파도의 리듬과 색깔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팔레트 나이프라는 얘기다.

마음 상태에 따라 사용하는 물감의 두께, 폭은 물론 색상도 달라진다. 그는 “물 작업은 스스로를 표현하며 서구 과학의 한계를 느낀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바다와 파도를 통해 동양사상을 그려 온 이유다. 안 화백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에서도 한국 작가로는 첫 개인전(10월1일까지)을 열고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