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 인쇄업체 등이 몰린 서울 을지로3·4가역 주변 이면도로에 예술가들의 작업실,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상권이 꿈틀거리고 있다. 한경DB
조명가게, 인쇄업체 등이 몰린 서울 을지로3·4가역 주변 이면도로에 예술가들의 작업실,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상권이 꿈틀거리고 있다. 한경DB
서울 중구 을지로3·4가역(2·3·5호선) 일대 상권이 조용히 뜨고 있다. 40~50년 된 낡은 저층 건물에 조명, 전기, 공구, 철공, 화공약품 등을 취급하는 소상공 업체들이 모인 이곳으로 예술가와 청년 창업자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조금씩 오르고 있다. 인근 첨단 고층빌딩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1970~1980년대 정취가 매력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작가·청년 창업자 몰려

15일 을지로 일대 중개업소들에 따르면 을지로3·4가역 주변 이면도로에는 이색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진 예술가·디자이너들의 숍인숍(매장 안에 또 다른 매장을 만들어 상품을 판매하는 새로운 매장 형태), 전시장 등 복합공간 등이 생겨나고 있다. 이곳에 입주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소일거리로 창업한 카페나 선술집 등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홍대나 가로수길 상권의 초기 모습과 닮았다고 인근 중개업소들은 설명했다.

을지로3가 이면도로변 낡은 인쇄소 건물 4층에 자리 잡은 ‘호텔 수선화’는 문을 연 지 1년 조금 넘었지만 을지로의 명소로 떠올랐다. 패션 및 잡화 디자이너 세 명의 작업실이자 차와 맥주, 와인 등을 파는 카페다. 간판이 없어 찾기 힘들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저녁이면 문전성시를 이룬다. 낡은 콘크리트 벽면을 그대로 드러낸 인테리어에 빈티지한 조명과 낡은 동양화 액자 등으로 꾸며져 있다. 숍인숍 형태로 디자이너들이 직접 제작한 상품도 판매한다.

이 이면도로에 들어선 카페 ‘신도시’도 인기몰이 중이다. 30대 작가들이 서울청소년수련관 옆 낡은 건물 5층을 작업공간(녹음실 인쇄실 등)이자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을지로2가 사거리 인근 좁은 골목 사이에 들어선 커피숍 ‘커피 한약방’은 2층을 확장한 데 이어 별관까지 마련했다. 2014년 연극배우 강윤석 씨가 개업한 이곳은 낡은 건물, 자개장과 오래된 전등갓, 다이얼식 전화기 등 빈티지 가구·소품이 가득하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게스트하우스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옛 정취와 저렴한 숙박료에 매력을 느껴 이곳을 찾는 외국인이 늘고 있어서다.
임대료 강세

인근 중개업소에 따르면 최근 들어 이 일대 상가에 대한 임차 문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예술가들이 주로 찾는 66㎡ 안팎의 점포 임차료는 보증금 1500만~2000만원에 월세 150만~200만원 수준이다. 2~3년 전에 비해 평균 10% 정도 오른 가격이다. 인근 세운공인의 조명일 대표는 “인쇄소나 공구가게였던 자리를 카페나 스튜디오로 쓰겠다며 알아보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며 “목이 좋은 곳의 임대료는 최고 50%가량 올랐다”고 전했다.

예술가들이 이곳을 선호하는 것은 각종 재료상과 제작업체가 몰려 있어 작품에 필요한 다양한 재료를 싼값에 구매할 수 있어서다. 서울 중심부여서 대중교통 여건도 좋다. 건물이 노후화돼 임대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전용면적 20~23㎡ 공간을 보증금 200만~500만원, 월세 20만~50만원에 빌릴 수 있다.

을지로3가에 작업실을 연 지 9년째인 손원영 작가는 “작가들은 넓고 저렴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며 “뜻밖에 서울 한복판 을지로에서 딱 맞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림상가에서 조명가게 영도LED라이팅을 운영하는 이준용 대표는 “1970~1980년대 모습, 시대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은 동네 특유의 분위기 등이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한다”고 설명했다.

상권이 입소문을 타면서 터줏대감들이 임대료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을지로 일대엔 수표·명동·저동 도시환경정비구역,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충무로 도시환경정비구역 등의 개발이 추진 중이다.

문화인류학자인 김정아 씨는 “세운상가와 주변이 무분별하게 개발되면 을지로 일대도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유명 맛집이 장악할 것”이라며 “가로수길과 연남동 등에서 그랬던 것처럼 터줏대감들은 이곳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