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의 참화에서 세계는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국제연맹을 탄생시켰다. 국제연맹은 비정치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강대국 간 분쟁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연맹을 탈퇴하면서 정치적 수명을 다했다. 국제연맹이 붕괴할 무렵 ‘우주전쟁’의 작가 겸 문명비평가인 영국의 H G 웰스는 ‘단일 세계국가’ 구상을 담은 《세계사 대계》를 출간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항구적인 국제평화와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유엔(국제연합)이 출범했다.
이때가 세계정부론의 황금시대다. 핵전쟁의 두려움이 세계정부 논의를 급속히 진척시켰다. 조약으로부터 법적 질서로의 전환이 모색됐다. ‘세계연방정부’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국민등록을 받기도 했다. 세계정부에 대한 논의는 냉전 종식 후 주춤해졌지만 물밑에서 여전히 활발하다. 미래학자 폴 라스킨은 세계헌법이 2032년에 만들어지고 지구정부나 연방정부가 탄생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세계정부론의 또 한 축은 사회주의적 이상론과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정치적으로 무산계급의 독재와, 경제적으로 공산주의 제도가 확립되면 국가는 쇠퇴한다고 봤다. 개별국가를 소멸시키고 국경을 없앤 인터내셔널의 신질서다. 레닌도 ‘우리의 종국적인 목적은 국가라는 탈을 쓴 모든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폭력을 파괴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음모론이다. 세계정부라 부를 만한 비밀결사로서의 거대한 엘리트 권력이 이미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영국왕실을 비롯한 유럽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과 앵글로색슨 자본가들이 핵심이라며 300인 위원회, 섬의 클럽,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원탁회의 등의 이름이 회자된다. 스케일도 엄청나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도 그리고 미국의 건국도 비밀결사의 개입으로 설명한다.
스티븐 호킹이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AI가 통제불가능한 시점이 빠르게 다가오는 데 따른 잠재적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세계정부는 독재정부 가능성을 내포한다. 영국은 EU마저 싫다며 독립을 선언한 마당이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