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때인 서기 520년 이뤄진 신라의 율령(律令) 반포는 백제와 고구려보다 늦었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 사법·조세 체계가 강력하게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에서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년)과 진흥왕(재위 540∼576년) 때 지방 지배 체제와 조세 체계를 규명할 수 있는 6세기 중반 목간(木簡·글씨를 쓴 나뭇조각) 23점을 발굴해 4일 설명회를 열어 공개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4개 면에 모두 글씨가 쓰인 4면 목간 1점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2014년부터 2년간 발굴조사해 찾아내 보존처리를 마친 이 목간의 크기는 길이 34.4㎝, 두께 1.0~1.8㎝로 네 면에 글자 56자가 쓰여 있다.

목간에는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성(城)에 있는 ‘대사(大舍)’ 관등의 관리에게 잘못된 법 집행을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촌주는 ‘급벌척'(及伐尺)’ 관등의 이타리(伊他罹)라는 사람이 60일간 일해야 하는데 30일만 하고 돌아갔다고 보고했다. 연구소는 ‘□법(法) 30대(代)’ ‘60일대(日代)’라는 목간의 표현은 기간을 명시한 법률 용어로, 기강이 선 지배 체제가 확립됐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또 신라 도읍 사람들의 17관등 체계인 ‘경위(京位)’ 중 12등급을 이르는 ‘대사’(4두품의 최고위직)라는 글자에도 주목했다. 성산산성 출토 목간 중 경위의 관등명이 나온 것은 처음으로,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함안 지역도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설명이다.

‘급벌척(及伐尺)’은 지방 거주자 관등체계인 ‘외위(外位)’의 관등명으로 추정되지만 ‘삼국사기’에는 기록돼 있지 않아 신라의 관등명이 계속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소는 주장했다.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이전에 나온 목간은 물품 목록을 기록한 화물 꼬리표인 데 비해 이 목간은 보고서 형태로 기승전결 형식을 갖췄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은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효력이 크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번 목간을 통해 신라가 법치국가이자 문자가 일상화된 사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두의 6세기 사용설도 제기됐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두 면의 문구 마지막에 있는 갈지(之) 자는 이두식 표현일 수 있으며 이럴 경우 이두는 8세기가 아니라 6세기부터 쓰였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7세기 문서 목간이 많이 발견됐다”며 “성산산성의 사면 목간이 완벽한 문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목간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발굴조사에서 총 23점의 목간을 발굴했다. 삼국시대 산성인 함안 성산산성은 지금까지 출토된 고대 목간의 절반가량인 308점이 출토된 ‘목간의 보고’다.

양병훈 기자 hu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