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전시장에서 실시간으로 상영되는 박경근의 영상작품 ‘천국의 계단’.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전시장에서 실시간으로 상영되는 박경근의 영상작품 ‘천국의 계단’.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은 한국 근대미술의 ‘3대 천왕’으로 불린다. 갤러리 현대가 국내 미술시장에 처음 소개한 1970년대 초만 해도 이들의 그림값은 100만~300만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에 팔렸다. 지난달에는 김환기의 1970년작 노란색 점화 ‘12-V-70 #172’가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63억3000만원에 낙찰돼 한국 미술품 최고 낙찰기록을 경신했다. 이들의 작품값이 40여년 동안 300~600배 이상 치솟은 셈이다. 이들 인기 근대 작가의 작품은 매물이 없는 데다 값도 너무 많이 올라 투자자들의 관심이 ‘옐로칩 작가’로 옮겨가고 있다.

그동안 근대미술 거장과 원로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춰온 국내 최대 화랑 갤러리 현대가 뽑은 미래의 블루칩 작가는 누구일까. 갤러리 현대는 박경근(38), 양정욱(34), 이슬기(44) 등 30~40대 ‘이머징 아티스트’ 3명을 선발해 다음달 15일까지 기획전을 연다. 갤러리 현대가 개관 46년 만에 처음 여는 유망작가 그룹전이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현대미술이 어렵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눈 내리는 모습을 그저 자연스럽게 바라보듯 작품을 즐겨보자는 의도에서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며 성장한 선배 작가들과 달리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고 자란 젊은 작가들은 톡톡 튀는 개성과 참신한 기법으로 현대인의 소통과 관계성을 유쾌하게 풀어낸 벽화, 설치, 영상작품 등 30여점을 내놨다. 출품작들은 언뜻 잡탕처럼 보이지만 각양각색의 개성을 반영하는 만큼 난장을 벌이는 듯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올해 삼성미술관 리움이 선정한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받은 미디어아티스트 박경근은 현대인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을 묘사한 영상작품 ‘천국의 계단’을 내놨다. 2003년 방영된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 등장하는 복잡한 남녀관계에서 영감을 받아 지난 7일 전시회 개막 당일 전시장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이다. 발레리나 김지영, 무용가 김병조, 배우 문재경, 모델 최낙권이 연기자로 출연해 인간관계와 사랑에 얽힌 복잡한 감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갈등과 대립 속에서 수시로 변하는 인간의 감정선이 색채 프리즘처럼 다가온다.

설치작가 양정욱은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재가공해 예술 자체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슬쩍 서사적 메타포의 멋을 부렸다. 나무, 실, 모터를 활용해 작업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는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를 통해 단절된 소통이 복원되는 과정을 형상화한 설치작품이다. 천천히 움직이다가 한 번씩 삐끗하는 나무 조각의 동작에서 사소한 다툼 때문에 서로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읽힌다.

다리를 다친 뒤 회복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을 담은 ‘고난은 희망이라고 속삭인다’, 소통이 의외로 쉽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그는 선이 긴 유선전화기로 한참을 설명했다’ 등도 눈길을 붙잡는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슬기는 오방색 이불 조각으로 속담을 시각화한 작품, 군복 무늬에 고대 멕시코의 상형문자를 수놓은 벽화, 4m 크기의 막대 봉에 색깔을 입힌 작품 등으로 관계와 소통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을 내보인다.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유망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초대전 형식으로 모았는데 의외로 완성도가 높고 개성이 도드라져 놀랐다”며 “정체성을 탐색해온 작가들의 순간적이고 본능적인 작업 태도, 열정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