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권력은 광장에 있으므로 검찰은 군중의 비위를 맞춘다. 한 사람을 제외한 그 어떤 대통령도 이런 조롱을 당한 적이 없다. 기밀누설이라지만 대한민국 기밀을 북한이나 다른 적대국에 누설한 것도 아니다. 강제로 돈을 걷는 일은 전직 대통령들도 해왔던 일이다. 김대중은 남북 정상회담 대가로 특정 기업의 돈 수억달러를 북한으로 송금케 했고, 노무현은 특정 기업 8000억원을 포함해 상당수 기업들이 각기 사회공헌기금을 내놓게 했다. 이명박 역시 미소재단을 세우는 데 기업들로부터 수천억원을 출연받았다. 최순실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남대문시장 상인들이었다면, 대통령이 자신의 연설문과 몇 가지 정책을 미리 읽어보도록 한 것은 아마도 미담이 됐을 것이다. 문제는 최순실이었다.

언론은 적개심에 가득 차,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조롱의 열기가 식어들까 노심초사하며 군불을 때고 있다. 학교에는 시위 증명사진을 찍어오면 리포트를 면제해준다는 교수와 거리로 나가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오라는 철없는 교사들이 넘쳐나는 형국이다. 어쩌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지경이 됐나. 사실 박 대통령의 정치 행적은 한국 정치가 명분과 도덕주의 함정에 함몰돼 온 일련의 과정 그 자체요, 작금의 사태는 소위 도덕 정치가 만들어 낸 자승자박의 결과다. 그리고 한때 비슷하게 조롱당했던 노무현의 몰락과 정확하게 같다.

물론 이 모든 경과를 대통령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타협불가의 자세로 지난 수년 동안 도덕 정치의 의제들을 선도해왔다. 경제민주화라는 낡은 도덕적 구호를 정치 아젠다로 되살린 것부터가 그랬다. 그는 보수주의자였지만 그것의 본질인 경제적 자유와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다. 경제민주화는 생산의 동기와 분배의 결과를 혼동하는 좌성향 도덕질서에 속한 것이다. 희망과 당위를 정책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결국 이기적 기업과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해 도덕적 권력의 통제하에 두려는 것이 그 본질이다. 취지가 좋으니 협력해 달라는 것은 모든 도덕적 구호가 앞세우는 상투어다. 그렇게 박 대통령은 “기업들도 문화융성에 협력해 달라”고 별다른 주저 없이 말했던 것이다. 대통령이 월급을 떼기로 한 청년희망펀드가 실은 ‘에바 페론 놀이’일 뿐이라는 비판은 아쉽게도 청와대에 가닿지 못했다.

세종시가 그렇고 국회선진화법이 그렇고 인사청문회가 그랬다. 모든 아름다운 구호는 그 속에 치명적 독소를 갖고 있다. 균형발전의 세종시는 유능한 정부를 서서히 절해고도의 격리 수용소로 변질시켰다. 세월호와 메르스의 그 허둥대던 정부는 그렇게 태어났다. 세종시를 확보한 충청도의 힘은 반기문을 기어이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겠지만 좋은 대통령을 가질 기회는 차단하고 말았다. 인사청문회는 한나라당의 비열한 계산과 박근혜 대표의 선의의 합작품으로 태어났다. 국무회의와 청와대는 깨끗한 그러나 무능한 인물로 서서히 교체돼 갔다. 장관들은 국회에서 무릎을 꿇고, 서청원 박지원 같은 자(者)들의 다리 사이를 기어서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관료는 무력화되고 국회는 독재체제로 전환됐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앞장섰던 국회선진화법은 정부를 무력화하는 일종의 자살기계처럼 작동하고 있다. ‘3분의 2결’을 요구하는 이 도덕적 제도는 모든 개혁입법을 무산시키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국정의 무능은 축적되지만 그 결과는 대통령 책임으로 귀착된다. 그렇게 박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장치들에 의해 마치 구속복을 입은 것처럼 무기력한 대통령이 돼 갔다. 장차의 모든 대통령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영란법은 가장 최근의 일이었다. 밥값 3만원, 강사료 20만원도 그렇지만 “캔커피도 금지”라는 권익위의 주자학적 장난질에 언론과 학교는 깊은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바로 그때 대통령의 도덕적 함몰 사태가 터진 것이다. 언론과 교단이 느끼는 명예훼손적 상실감은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도덕주의 성향은 줄어들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시쳇말로 민중주의에 가깝다. 비극은 되풀이된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